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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자료/러시아 연극 자료

모스크바 소브레멘니크 극장

 

단련된 강철(鋼鐵)과 같이 - <러시아 소브레멘니크 극장>


글․박정곤


러시아의 4월은 계절의 전환기와도 같다. 더 정확히 말해, 모스크바의 4월은 1년 중 눈과 햇볕의 온기가 공존하는 유일한 달이라 할 수 있겠다. 영하 5-6도를 넘나드는 야간의 냉기가 낮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순풍이 되어 모스크비치1)들의 두터운 외투를 끌어내리며 그윽한 볕으로 그들을 눈부시게 만드니 말이다. 녹아내린 눈물로 비록 거리는 질퍽대지만, 그럼에도 인도를 가득 덮은 얼음 대신 초록이 드문드문 피어난 대지를 디디고 설 수 있다는 색다른 유쾌함을 4월은 선사한다.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로 문화 예술계가 어두운 그림자로 덮여 있는 지금, 모스크바의 극장들은 얼어붙은 시민들의 마음을 눈 녹이듯 달래는데 한창이다. 더욱이 지난 3월 말에 거행된 러시아 최대 공연예술 축제인 '황금 마스크' 축제마저 비교적 조용히 마감되는 상황이라 분위기는 더욱 초연하다. 이렇게 식어가는 관객들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소브레멘니크' 극장(Театр Современник동시대인을 의미-역자 주)은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으니 그들의 인기 비법(?)을 살며시 들여다보자.


시련과 극복의 윤회(輪回)-소브레멘니크 극장

소브레멘니크 극장의 역사는 반백년 전의 전후(戰後) 소비에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의 상흔이 겨우 아물어 가던 1956년 무렵 연극을 향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예술인들이 힘을 모아 극장을 설립하였는데, 설립 대표자 군에는 오늘날 러시아 연극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70년대 최고 연출가로 칭송받았던 모스크바 예술 극장(MXAT-이하 예술극장)의 전(前) 예술 감독 올레그 예프레모프(O. Efremov)와 현(現) 소브레멘니크 극장의 예술 감독인 갈리나 볼체크(G. Volchek)가 설립의 주축이 되었으며, 비평가 M. 다브이도바가 '러시아 연극 길드의 상인'이라 칭한 현 예술극장 감독 올레그 타바코프(O. Tabakov), 명배우 릴리야 톨마체바 등도 뜻을 함께 하였다. 배우진으로는 모스크바 예술극장 스튜디오를 갓 졸업한 학생-예비배우들이 당시 극단에 주류를 이루었다.

소브레멘니크 극장은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소비에트 예술계에 '저항주의'를 심은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극장이 설립될 당시, 그들의 대(大)스승 격인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의 전통은 사회주의적 사관에 의해 그 의미가 약화되었으며, 검열과 압제는 공연예술계에 침체기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기에 심지어 대공황마저 찾아와  불청객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니, 소브레멘니크 극장도 예외 없이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중첩된 악재 속에서도 극장은 연극적 침체기에 대항하며 선대가 창조해 낸 사실주의 연극기법의 발전과 심리주의 연극의 가능성을 삶 속에서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당대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관객들과 대화하고 호흡을 나누고자 했던 설립자들의 의도는 소브레멘니크 극장만을 위해 특별히 창작된 작품들을 생산하였다. 실례로, 빅토르 로조프(V. Rozov)의 <영원히 살아있는 자들>은 소브레멘니크를 위해 창작된 작품이자 극장 초연작으로, 러시아 전역의 비평가와 관객들의 관심을 어제의 학생이었던 배우들에게 집중시켰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필두로 하여 올레그 예프레모프와 갈리나 볼체크의 명성도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설립자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실로 극장은 자신들만의 차별화된 예술적 지향점을 공고히 하였으며, 경험의 부재로 정형화된 연극양식에 익숙했던 배우들은 균형미를 갖춘 소브레멘니크식 무대 표현법을 점차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간의 내면에 관한 문제와 배우에 의해 재창조된 '일상의 문제'들이 무대 위에서 진정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극장 레퍼토리의 대부분을 현대 극작가들의 작품이 차지했던 점도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당연한 처사였다. 특히 그들이 보여준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 당대 인텔리겐치아와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적극적인 호응을 보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을 두고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연속이라 했던가. 알렉산드르 볼로딘(A. Volodin)의 <오야(五夜)>, <맏딸>, 빅토르 로조프의 <결혼일>, <전통 연회>,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와 같은 작품들로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만원사례를 보였던 소브레멘니크 극장도 1970년대에 들어서며 분열의 종국을 맞이하였다. 검열의 전횡에 대항한 그들의 투쟁은 '냉전'으로 변해버린 시대조류에 의해 더욱 힘겨워졌으며,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연출가 올레그 예프레모프가 예술극장 감독으로 전출해 가며 생긴 공백이 지도부의 분열을 야기하였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초유(初有)의 사태를 두고 '동시대 지성의 종말'을 예고하였으며, 또 다른 이들은 극장이 폐쇄될 것이라는 소문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극장은 대부분의 상연 레퍼토리를 포기하여야 했으며, 급기야 중견 배우들의 이탈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파멸의 종국에서 극장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여배우 갈리나 볼체크가 새로운 상임 연출가로 선출되었다.


철(鐵)의 여인, 갈리나 볼체크

지난 글들을 통해 필자는 러시아 예술계를 주름잡는 여성 활동가들의 권위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발레 교육계의 마이스터 마리나 레오노바, 극장 경영분야에 타티아나 이오시포브나, 그리고 정치계에 발렌티나 마트비옌코(상트페테르부르크 주지사)가 있다면, 연단(演壇)에서는 단연 철의 여인, 갈리나 볼체크를 뽑을 수 있다.

현재는 연출가로 저명하지만, 실제 갈리나 볼체크의 예술적 노정은 배우에서부터 출발한다. 1933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녀는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시나리오 작가인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가정환경이 진로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쳐, 배우 지망생이었던 그녀는 모스크바 예술극장 스튜디오에 입학한다. 1957년 영화 <돈키호테>에 출연하여 명성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부터 1996년 <천사와의 20분>에 출연하기까지 갈리나 볼체크는 수십여 편의 영화를 통해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스튜디오 졸업 이후 배우로서 길을 걷던 그녀의 운명을 흔들어놓은 대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소브레멘니크 극장의 설립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소브레멘니크 극장의 위기 상황 하에 1972년부터 극장의 경영권과 상연 레퍼토리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은 갈리나 볼체크는 대수술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연출가에게 요구되는 창조적 작업은 그녀에게 새로운 지평(地平)을 열어주었으며, 개인적으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배우로서의 면모는 묵은 떼처럼 훨훨 털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배우 갈리나가 아닌 연출가 갈리나로서의 재탄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극장 내부에서 갈리나 볼체크는 얼마 남지 않은 중견배우들의 단결을 도모하여야 했고, 외부로는 턱없이 부족한 배우진을 보강하기 위해 주야로 뛰어다녀야만 했다. 그녀의 활약에 힘입어, 이후 극장에는 마리나 네욜로바, 발렌틴 가프트와 같은 새로운 배우들이 영입되었으며, 동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에 관해 이전처럼 열띤 논쟁을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극장의 붕괴는 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극장은 힘겹지만 희망으로 가득 찬 갱생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갈리나 볼체크는 <백년보다 긴 하루>의 작자인 저명한 소설가 친기즈 아이트마토프(Chingiz Aitmatov)와의 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트마토프의 작품을 무대로 옮기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당대 소설계의 거장이었던 그의 작품을 극화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무리수를 수반하였다. 즉, 원작의 명성에 손상이 가해질 수도 있을뿐더러, 무대에서 상연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모두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우려에 굴하지 않고 <후지야마 등반>을 성공적으로 상연함으로써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이와 동시에 산문의 무대화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결과적으로 <후지야마 등반>의 성공은 극장의 재건에 큰 힘을 불어넣었다. 이 작품의 뒤를 이어 1989년에 이르러서는 에브게니 긴즈부르그의 산문을 극화한 <험난한 노정>이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미국과 독일, 핀란드 등지에서 행해진 순회공연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는데, 소브레멘니크 극장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떨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예술 감독과 중진 배우들의 부재라는 극장의 비극적 상황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그녀를 두고 '철의 여인'이라 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지도 모른다. 1967년 소비에트 상 수상을 비롯하여 2001년 문학 예술부분 대통령상 수상, 2008년 예술 공연 및 공연 경영에 관한 '국가 공로훈장'을 수여하기에 이르기까지 수십여 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수상 경력은 과히 철의 여인으로서 끊임없이 활동한 그녀의 이력을 뒷받침해준다.

비평가 타티아나 페트로바의 말에 따르면 갈리나 볼체크는 상상 이상으로 미래지향적인 연출가라 한다. '나는 항상 내일과 모레, 그리고 그 이후의 미래를 생각한다'고 했던 어느 인터뷰에서처럼 그녀는 '회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즉 '쓰린 과거에 대해서는 회상조차 사치'라는 등식을 그녀는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칠순을 훌쩍 넘긴 노(老)연출가가 된 갈리나 볼체크에게서 여느 젊은 연출가 이상의 정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그녀가 지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달음질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동시대의 미래를 개척하며

오늘날 소브레멘니크 극장의 레퍼토리를 유명세에 올려놓은 대표작들이 가지는 공통점을 살펴보자면 지극히 러시아 적이면서 현대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벌써 1000여회 이상 상연된 진기록을 가지고 있는 레마르크의 <세 사람의 전우>를 비롯하여, 알렉산더 뒤마, 버나드 쇼로 이어지는 외국 작품들도 있지만 레퍼토리의 대부분이 20세기 중후반에 창작된 소비에트 희곡들이며, 개개 작품들은 러시아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잇고 있다. 갈리나 볼체크를 미국으로 초청받게 한 미하일 로쉰의 <에셸론>,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의 <안피사>, 알렉산드르 볼로딘과 니콜라이 콜랴다의 작품 등이 현재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것은 이처럼 극장의 색깔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갈리나 볼체크는 고전에 대한 관심도 잃지 않았다. 고골의 <검찰관>을 비롯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그리고 미하일 불가코프의 <위선자들의 밀교>도 소브레멘니크에서 상연된 바 있다. 여기에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와 <벚나무 밭>은 극장의 영양소로 역할 하는 주옥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한국에도 알려진 <귀머거리 나라>, <굿바이, 레닌>과 같은 영화에도 출연한 여배우 출판 하마토바(Chulpan Kxamatova)가 차녀인 마샤 역을 맡고, 1989년부터 소브레멘니크의 주연배우를 도맡아 활동 중인 올가 드로즈도바가 동명(同名)의 장녀 올가를 연기하는 <세 자매>는 비평가들이 최고로 뽑는 소브레멘니크의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소브레멘니크는 끊임없이 당대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대중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보다 근접시키고 있다. '동시대인'이라는 극장의 명칭은 시대를 불문하고 그들이 변함없이 현실과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시대의 지성과 함께한다는 의미를 가지리라. 바로 여기에 소브레멘니크 극장의 저력이 담겨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