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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자료/러시아 연극 자료

모스크바의 <몽테크리스토>

아듀, 2009! - 모스크바 국립 오페레타 극장

 

글․박정곤


해다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형형색색의 불꽃으로 가득한 송년 축제, 그리고 올 한해도 무사히 지났음에 축배를 드는 사람들. 순백의 눈꽃이 만발한 크리스마스이브를 고대하는 우리에게 12월의 모스크바 정경은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특히 시베리아 대륙의 기나길고 때 묻지 않은 겨울밤의 정취는 오늘날 더없이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들을 배출한 장본인이라 하겠다. 작품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날카로이 조명한 거장 톨스토이(L.Tolstoi)와 도스토예프스키(F.Dostoevskij)도, 그리고 시(詩)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렉산드르 푸쉬킨(A.Pushkin)도 바로 이 시베리아의 동야(冬夜) 속에 창작열을 불태워 불멸의 작품들을 탄생시켰으리라.

기축(己丑)년의 시작도 엊그제 같았는데 이처럼 벌써 한해의 끝자락에 우리는 서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였던가. 무수한 만남과 이별 속에 아쉬움으로 남은 것은 나 혼자가 아니기에, 모두가 서로를 감싸 앉으며 맑고 투명한 보드카 한잔 속에 지난 일 년의 희로애락을 담아낸다는 무명 시인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렇게 러시아인들은 한해의 묵은 때를 떨어내고자 했던 모양이다. 더욱이 러시아에는 12월 말부터 1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긴 휴가가 있기에 한해의 끝은 새해의 시작과 끊임이 없이 줄곧 이어진다. 심지어, 우리와 달리 크리스마스마저 1월인지라 진정 연말과 연초는 하나인 듯하다.

그 가운데 차분히 한해를 정리하고자 하는 러시아인들이 애용하는 특별 처방전이 있으니, 바로 '공연관람'이다. 필자가 수차례 강조한 바 있듯, 러시아인들에게 살을 에는 냉기와 동풍은 무시 대상에 불과하다. 영하 20도를 넘나들던 지난겨울에도 이들은 아랑곳 않고 이런저런 공연장을 찾았으며, 그 기운은 올해도 다를 바 없을세라 예매열기로 이어져 수천석의 극장들이 벌써 매진을 보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뮤지컬의 열기는 이제 절정에 이르러 더없이 높이 타오르고 있다. 서구 뮤지컬이 본격적으로 상연 된 것이 비록 2000년대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츠>(Cats)와 <맘마미아>(Mamma Mia),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 등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작품들은 이제까지 어느 한편도 빠짐없이 매해 상연되어 왔다. 그러한 작품들 가운데 유독 2009년 한해를 빛내었던 작품이 있으니, 바로 모스크바 국립 오페레타 극장의 <몽테 크리스토>(Monte Cristo)이다. 


아듀 2009! 아듀 <볼쇼이 캉캉>! - 국립 오페레타 극장

희곡을 바탕으로 무대에서 상연되는 연극 작품 가운데 음악이 가미된 작품들을 '악극(樂劇)'이라 통칭해보자. 실례로, 벨칸토 창법에 장중한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펼치는 오페라가 있을 테고, 가녀린 바이올린 선율에 인간언어를 대신하여 율동만으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자하는 현대예술 장르인 아방가르드도 있을 것이다. 또한 더빙된 음악과 보컬, 그리고 무용과 대사가 적절히 가미된 뮤지컬도 있다. 이렇듯 오늘날 상연되는 악극의 장르는 실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오페레타(operetta)'라는 장르가 있다. 사전적 해석을 살펴보자면, 오페레타는 상류사회에 성행했던 오페라를 보다 서민들에게 가까이 하고자 만들어낸 장르라 한다. 그 과정에서 오페라의 장중함은 다소 가벼운 오락적 성격으로 변모되었으며 통속적인 내용의 가사는 당대의 일상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16세기부터 성행했던 이탈리아아의 코메디 악극인 '코메디아 텔 아르트(comedia dell' arte)'나 음악이 가미된 가벼운 희극인 '보드빌(vaudeville)' 장르에서 기원을 찾기도 하는 오페레타는 일상적인 내용에 가무가 곁들여져 있어 오늘날 뮤지컬의 효시라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장르에서 기원하여 국립 러시아 오페레타 극장의 명칭은 만들어졌다. 오페레타 극장의 역사는 약 9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볼쇼이 캉캉>이라는 작품이 상연되고 있어 '캉캉 극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한 오페레타 극장은 1922년 사설 극장으로 설립되었으며, 슈톨츠(R.Shtolz)의 <파보리트>를 초연으로 상연의 출발을 알렸다. 전형적인 반원형 극장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실내 장식과 무대는 발레나 오페라와 같은 고전 작품이 상연되어야 어울릴 법하다. 화려한 샹들리에 장식의 천정 조명과 무대를 덮고 있는 붉은 장막은 금방이라도 차이코프스키의 백조들이 발끝을 세우고 등장할 것 같이 느껴진다.

이처럼 고전적 건축 양식을 따르는 극장에 현대식 조명과 음향 기술 설비가 구비된 연유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면 그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두나예프스키(M.Dunaevskij)의 <흰 아카시아>, <광대의 아들>을 비롯하여 소비에트 오페레타를 상연하던 극장에 대규모의 서구 뮤지컬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재정비의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고전적 미를 자랑하는 홀에는 현대적 장치와 기술이 가미되어 신구(新舊)가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세계 최고의 시설과 공연 장비를 자랑하는 우리의 극장에 비해 아직 방음의 문제나 좌석의 편리함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나, 그럼에도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걸작들의 상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불편함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소비에트 붕괴 후 밀레니엄을 거치면서 극장은 다양한 방면으로 실험을 행하였다. 특히 서구 뮤지컬 형식을 도입하면서 극장의 고유장르인 '뮤지컬 코메디'가 소실되지 않도록 극장 관계자들은 뜻을 모아 보존에 힘썼다. 이처럼 고전적 바탕 위에 신작 뮤지컬이 도입되다 보니 개개의 작품에서는 러시아 고유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실례로, 2001년 모스크바시 문화 위원회의 지원에 힘입어 뮤지컬 <메트로>(Metro)가 상연된 일은 당대 혁신적인 사건이었으나,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서구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하였으나 동작 하나하나에서는 러시아 발레의 전통이 스며났으며, 배우들의 숨겨진 재능이 적재적소에 발현되어 러시아 뮤지컬의 발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기에 <메트로>는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한 작품들이 러시아에 훌륭히 선보여지도록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극장에서는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가 후속작으로 상연되었으며, 이 작품은 더욱이 러시아적 무대 환경에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비평가들의 회의적인 견해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오페레타는 장르적 특성상 그 내용이 가볍게 여겨질 수 있는 반면, 이 극장은 오페레타 극장이란 명칭과 어울리지 않게 심지어 '아카데믹'이란 칭호마저 가지고 있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나 극장의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오페레타라는 장르 속에서 보다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겠다는 뜻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러시아 예술의 특성이 이곳 오페레타 극장에서도 잘 나타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오페레타 극장은 유행하는 현대 뮤지컬 장르만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뮤지컬 코메디'라는 고전적 예술 장르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의 화려한 부활 - 러시안 뮤지컬 <몽테 크리스토>

주지하다시피, 알렉산드르 뒤마의 원작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억울한 누명으로 인해 자신의 젊음과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긴 한 청년이 복수해 나가는 과정을 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작품이 창작되던 1845년 당시 이 소설이 파리 경찰서의 문헌에서 발견된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이 소설로 뒤마는 이전의 명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으며,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으로 그의 소설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원전에 충실한 뮤지컬 <몽테 크리스토>지만 그럼에도 소설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프로젝트 형식으로 구상된 <몽테 크리스토>는 러시아 최고의 무대 예술가들의 집산(集散)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라디미르 타르타코프스키(V.Tartakovskij)와 알렉세이 볼로닌(A.Bolonin)이라는 걸출한 프로듀서가 뜻을 모아 장고 끝에 공동 기획하였고, 현존하는 러시아 최고 음유시인인 한인 3세 율리 김(Ully Kim)과 로만 이그나티예프(R.Ignatiev)가 시와 텍스트, 작곡을 맡았으며, 공훈 예술가인 이리나 코르네예바(I.Korneeva)가 안무를 지도했다. 그러기에 2008년 시즌에 처음 개봉을 한 이후 지난 시즌에만 20만이 넘는 관객이 관람한 경이로운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실제 이 작품은 후기 소비에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28년 간 인기를 끌어 온 렌콤 극장의 음악극 <유노나와 아보스>라는 작품과 견줄 정도로 단시간에 널리 명성을 알렸다. 그만큼 작품성과 무대 구성이 뛰어나다.   

2막으로 구성된 뮤지컬의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곧 선장이 될 프랑스 청년 에드몽 단테스는 사랑하는 연인 메르세데스와 약혼 도중 법정에 끌려간다. 그녀를 짝사랑하던 페르낭과 그의 사주를 받은 검사 빌포르가 꾸민 간계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힌 그는 파리아 신부를 만나 지혜를 터득한다. 이후 신부의 죽음과 함께 14년간의 감옥생활에서 탈출하게 된 그는 몽테 크리스토라는 이름으로 사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후 그가 펼치는 화려한 복수극은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진정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더블 캐스팅된 주연 배우진은 연기와 가창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비평가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신예 이고리 발라예프(I.Valaev)와 블라디미르 드이스키(V.Diskij)가 에드몽을 맡고 있으며, 이미 기성 배우로 활발히 활동 중인 발레리아 란스카야(V.Ranskaya)와 아나스타시아 마케예바(A.Makeeva)가 메르세데스 역을 맡고 있다.

특히, 이들 가운데에는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과 그네신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체계적으로 익힌 전문 가수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로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실례로, 2막 후반 몽테 크리스토 백작의 정체가 밝혀지는 부분에서 메르세데스역의 발레리아 란스카야가 애읍하며 흘러내리는 절규는 보는 이들의 감성을 극도로 자극하며, 하이데 역을 맡은 고음의 여가수 라우라 플룐키나(L.Plenkina)가 뿜어내는 폭발적인 가창력은 페르낭의 비리와 신분 속임이 밝혀지는 장면과 너무나 잘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게 만들기도 한다.      


뉴욕과 런던의 벽을 넘어 뮤지컬의 본고장으로

이번 시즌은 오페레타 극장에게 더욱 중요한 시즌이다. 이유인 즉, 서구의 뮤지컬이 공습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러시아 뮤지컬의 명예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모스크바에서 상연되는 대부분의 뮤지컬 공연은 허가서(license)를 취득해 러시아 버전으로 상연하는 작품들이며, 고전을 개작하여 뮤지컬 연극을 올리는 '우 니키트스키흐 보로트'극장을 비롯하여 몇몇 곳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대부분이 서양의 그것을 모방하여 상연하고 있다.

그러기에 뮤지컬 <몽테 크리스토>는 러시아 뮤지컬의 자존심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필두로 두 거장 프로듀서는 더욱 새롭고도 러시아적인 뮤지컬을 창조해 나가고자 하고 있다. <몽테 크리스토>에서 비롯된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첫출발이 향후 어떠한 작품으로 이어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