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툰드라의 이색 축제 - < 순록축제>

유목민의 합창 - 툰드라의 노래 




5월 ‘가정의 달’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완연한 봄의 기운을 타고 대한민국 곳곳에서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기념하고자 크고 작은 행사가 연이어 열리는가 하면 각 지역에 자리한 묘소와 기념탑에서는 지난 세기 민주화 운동에 청춘을 바쳤던 선배들의 넋을 기리고자 엄숙한 마음가짐에 추모제가 열리기도 한다. 이처럼 축제와 추모라는 양자의 성격을 지닌 5월은 더러는 생명의 태동을 상징하기도, 더러는 잔인한 달로 일컬어진다.

어쨌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종일관 분주함 속에 5월은 지나간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해거의 한 달 내내 이어지는 각종 콘서트와 공연, 백일장과 사생대회는 5월의 유익함을 더하고 있으며, 가슴 가득 꽃을 달고 다니는 어르신들의 입가에 미소가 머무르는 어버이날 또한 빠뜨릴 수 없는 5월의 기념일이라 하겠다. 여기에 기억 속 잊혀져가는 스승님의 자취를 찾고자 학창 시절의 은사들을 찾아뵙는 스승의 날까지 이 달에 있으니 어찌 5월의 분주한 분위기가 끊일 수 있으랴. 

한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이와 같은 축제적 분위기는 계속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5월에 연중 가장 큰 행사들이 열린다. 일 년에 한번 찾아오는 ‘일’을 하는 모두를 위한 날인 노동절을 비롯하여, 2차 대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승전 기념의 날' 등 하늘에는 기다란 연기를 뿜어내는 제트기들의 축하공연이, 지상에는 오색 만국기가 바람에 휘날리며 붉은 광장을 가득 수놓는다.

그럼에도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축제가 다는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멀리 올라가다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야말 반도(The Peninsula of Yamal). 여기에서는 지금 북극 경계선을 따라 세계적인 이색 축제 가운데 하나가 한창 진행 중에 있으니, 바로 네네츠(Nenets)인들의 <순록 축제>가 그 주인공이다. 아직도 눈으로 뒤덮인 북극지방의 순록의 날 행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독자들은 거의 많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네네츠인들의 축제 현장으로 다함께 발을 들여 보자.



툰드라의 주인 - 네네츠인

러시아에서 툰드라 지대는 동북쪽 추코트카에서 서북쪽 무르만스크에 이르기까지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세부적인 지명을 살펴보자면, 추코트카 지역에는 소수민족인 축치(Chukchi)족이 살고 있으며, 코미(Komi)족이 사는 코미 자치구, 타미르 자치구, 그 아래로는 타이가로 접어드는 한티만시스키 자치구 등이 있는데, 필자가 방문한 곳은 바로 네네츠인들이 사는 야말로 네네츠 자치구라는 곳이었다. 이곳 또한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는 알라스카의 이누이트(Innuit)족이 사는 북극 생태와 거의 유사하다 할 수 있으나 순록이 얼마 남아있지 않는 알라스카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특히 야말 지역은 러시아 최대 순록 유목지로서 토지의 대부분이 초지 툰드라이며, 관목과 자작나무가 자라나는 숲지 툰드라도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다.

네네츠란 말은 순수 네네츠어로서 ‘진정한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러시아의 탐험가들이 툰드라를 넘어 극지방을 가고자 이곳을 이동할 때 원주민들이 사슴 생고기를 취하며 피를 마시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였을 것이다. 이로 인해 네네츠인들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으로 오인되어 사모예드, 즉 '스스로를 먹는다'(samoyed)는 뜻의 사모예드인으로 불렸다. 실제 네네츠인들은 식인의 관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말이다. 전체 러시아에 네네츠인들은 대략 4만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가운데 2만 7천에 달하는 네네츠인들이 이곳 야말로 네네츠 자치구에 살고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직도 유목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방목되는 순록의 수만 하더라도 50여만 마리가 넘는다.

또한 네네츠인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이것을 일컬어 네네츠인들은 ‘툰드라의 법칙’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개개의 가정에는 수십여 대의 썰매가 있는데 이 썰매들은 항상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썰매 중에는 성스러운 썰매라 불리는 썰매가 있어 여기에는 조상 인형 혹은 신성한 성물을 모신다. 이와 함께 이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역할은 철저히 구분된다. 남자들은 툰드라의 주된 생활요소인 순록들을 돌보며 관리를 하거나 혹은 자작나무, 전나무를 베어와 썰매를 만드는 등 바깥일을 하며, 여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페치카에 불을 지피고 아이들을 돌본다. 춤을 걷고 치는 작업도 원래 여자들이 맡아하는 일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모든 가족이 도와가며 춤을 치고 걷어 내고는 한다. 남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형들을 도와 순록을 몰며 올무 던지는 연습을 하며, 여자 아이들은 바느질을 배우며 자신의 가죽옷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영하 40-5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를 피하기 위해 유목민들은 숲 속에 춤(chum)이라 불리는 사슴가죽 움막을 치고 한겨울을 나는데 이곳 안은 얇은 긴팔 셔츠 한 장으로 지낼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실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었던 것은 비단 춤 안에서 타오르는 페치카뿐만이 아니었다. 네네츠족은 전통적으로 찾아오는 손님에 대해 환대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황량한 툰드라 지역에서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살아남기가 힘들 것이리라. 실례로 이동 중에 썰매를 끄는 순록이 다친다거나 혹은 급한 환자가 발생할 시에는 인근에서 유목을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나는 객들 또한 이들에게는 소중한 인연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불쑥 찾아드는 손님들이 이따금 있는데 이들이 들어서자마자 여주인은 아무런 말없이 곧장 차(茶)를 내어주고는 잠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들에게 있어 누가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있을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은 그저 어리석을 따름이다. 네네츠인들은 손님들이 때가 되면 자신의 갈 길을 가리라 여기며 춤에 머무를 때만큼은 마치 한 식구와 같이 대해준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네네츠어로는 우리식의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이 없다는 것이다. 좋다는 의미의 '사바'라는 단어만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우리처럼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며칠간 객으로 머물며 더나갈 때도 특별한 감사의 인사도 없이 유유히 길을 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네네츠인 사회의 어느 한 곳에서도 서로 다투는 모습을 필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아동들은 걷기 시작하면서 남자 아이는 바깥일을, 여자아이는 집안일을 배우는데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시되는 툰드라에서는 유아기부터 타인을 배려하고 서로 양보하는 마음을 수양하며 성장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습이 되었으며, 그러기에 네네츠인들 사이에는 비록 오가는 말이 적을 뿐 서로를 아끼는 마음과 온정은 언제나 가득해보였다.         



토착민을 위한 축제 - 순록 유목민의 날

일찍이 거의 대부분의 인류가 농경생활과 함께 특정지역에 정착하기 전까지 장대한 기간 동안 유목을 해왔다는 점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유목민들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인류의 태고적 모습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러시아인을 비롯하여 코미족과 한티족, 그리고 남부 카프카즈 산맥지역에서 올라온 카프카즈 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야말지역에서는 3월에서 5월에 걸쳐 순록의 날 축제, 정확히 말하자면 '순록 유목민의 날' 축제(이하 순록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는데, 물론 축제의 가장 큰 주인공은 단연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정착하고 살아왔던 네네츠인들이다.

순록 축제 행사는 역 50여 년의 역사를 가진다. 과거 소비에트 시절 순록 유목을 하던 원주민들이 주가 되어 정책적으로 유목민을 보호하고자하는 차원에서 전체 순록유목민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축제형식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축제를 통해 유목민들은 단순히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문제가 툰드라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지, 순록을 관리하는데 어떠한 애로사항이 있는지, 그리고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여야 하는지 등등을 논의하곤 한다.

행사 당일이 되면 마을 전체가 마치 구름 위를 걷듯 모두가 들떠있다. 선수입장을 알리는 악단과 기수단의 퍼레이드와 함께 축제는 시작되는데, 축제 기간 중에는 우리의 씨름과 유사한 민속 겨루기와 삼단뛰기, 썰매 뛰어넘기, 올무 던지기 그리고 순록 경주대회 등이 열린다. 특히 씨름과 같은 경우는 체중과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참가할 수 있는지라 어린 학생에서부터 불혹을 넘긴 중년의 신사들도 대거 참여하여 서로의 힘을 겨룬다. 또한 올무 던지기 대회는 순록을 몰 때 반드시 필요한 장비가 올무인지라 평소 생활 속에서 갈고 닦았던 기술들을 축제를 통해 유감없이 선보이곤 한다. 이 가운데 독특한 부분은 어느 경기를 막론하고 선수들은 반드시 ‘말리차’라는 두터운 순록 가죽옷을 입고 전체 경기를 이행하게 되어있는데, 우리라면 걸음걸이조차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불편할 테지만 네네츠인들은 가벼운 운동복을 입은 것처럼 재빠르게 몸을 놀릴 수 있었다. 생각해 보자면 현대 의복이 아무리 발달되었다 해도 이곳 툰드라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니 이 또한 네네츠인들의 지혜가 담긴 일상의 한 단면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거의 대부분의 종목들이 실제 툰드라에서 반드시 필요한 생활 요소들을 대변하고 있는지라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은 더욱 진지하다.

그러나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비단 이와 같은 경기들뿐만 아니다. 마을 곳곳에 들어선 임시 장터와 길거리 식당들, 그리고 민속의상을 뽐내며 거리를 활보하는 청춘남녀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지들과의 우연찮은 조우도 충분히 축제에 볼거리와 의미를 제공한다 하겠다. 특히 청춘 남녀들 사이에서는 축제 기간 중 서로 간에 마음이 오가 결혼에 이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한다.

이렇게 축제는 사흘간 밤낮으로 이어져 마지막 날인 일요일 밤에는 지방 출신 민속음악 가수들의 콘서트로 대미를 장식한다. 석학 라블레가 자신의 연구에서 언급했던 민중들의 ‘카니발’과도 같이 이날에는 모두가 흥겨운 마음으로 야외 잔치를 연다. 얼음덩이가 나뒹구는 마을 전역에서는 야간 행사를 위해 밤새 장작불이 타오르는가 하면 보드카를 드신 어르신들의 정겨운 콧노래는 우리네 시골 장터와 다를 바 없었다.

축제가 끝나고 나면 유목민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지평선만 존재하는 툰드라. 그곳으로 유목민들은 한가득 웃음을 싣고 돌아가는 것이다. 봄이 시작되는 5월 말에는 순록들의 출산과 더불어 북극해 쪽으로 북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마음가짐이 무거울 수밖에 없지만 연 사흘간 이어진 축제로 위로받은 네네츠인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썰매에 앉아 다시금 순록을 북방으로 몰아간다. 장대한 유목 대장정을 위한 축제를 접하자면 이들은 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생을 일깨우는 순록과 툰드라의 대자연이 있기에 이들의 마음은 언제나 여유롭게 내년의 축제를 흔쾌히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월간 <우먼 라이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