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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창작의 자유를 향하여. <모스크바 주(州) 문인촌-페레젤키노>


러시아에는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재미난 시골 구별법(?)이 있다. 전통적으로 이곳 사람들은 시골을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여 셀로(Село)와 제레브냐(Деревня)로 나눈다. 누가 보더라도 별반 차이나지 않는 시골 영지라 할지라도 그 곳에 교회가 있으면 셀로, 교회가 없으면 제레브냐가 된다. 조선 시대를 빗대어 말하자면, 절이 있으면 읍 혹은 면단위 소재지 정도로 인정받는 것이고 절이 없다면 보편적 의미의 촌(村)이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구별했을 때,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문인들의 작은 마을 페레젤키노(Peredelkino)는 셀로에 해당된다. 이유인 즉, 모스크바 외곽을 지나치는 철길을 건너자마자 마을 입구에 위치한 높다란 교회의 오벨리스크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교회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단지 사방으로 둘러쳐진 숲밖에 보이지 않는데 바로 이 숲 속에 문인들을 위한 <고요의 안식처>가 넓게 퍼져있다. 오히려 숨겨져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법하다고나 할까, 직접 숲속을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어디에 인가(人家)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자연을 아끼고 문학을 사랑하는 본지의 독자들을 위해 필자는 잠시나마 페레젤키노 숲속의 청지기가 되고자 한다. 

 

작가들을 위한 안식처-페레젤키노

문자화된 기록이 남기 전의 시간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누군가가 살고 마을을 이루고 또 공동체 삶을 영유하였지만 그것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아즈텍(Aztec)의 전설처럼 신비로만 떠돌지 않을까? 하지만 인간에게는 구전(口傳)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것 또한 무턱대고 허구(虛構)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문서화되지는 않았지만 페레젤키노의 역사는 더듬어 올라가 보면 루키노(옛 지명)라는 촌락에서 출발한다. 1646년 경 이곳에는 <프레오브라제니야>라 불리는 목조 교회가 세워졌다.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은 점차 번성하였으며 인구가 많지는 않지만 제정 러시아 시대에도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일임 받았다. 대조국 전쟁(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의미함-필자 주) 이후 정교회의 요구에 따라 사원영지 내에는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총주교인 알렉세이 2세의 여름 체재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덕분에 현재까지도 교회는 유지되고 있으며 신앙심 깊은 이곳 주민들의 정신적인 지주목 역할을 하고 있다.

1934년부터 마을에는 문인촌(文人村)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오늘날 페레젤키노를 유명하게 만든 직접적인 연유가 된다. 그것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는 듯, 교회 앞 공동묘지에는 영화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인 시인 아로에니 타르코프스키를 비롯하여 추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 등 소비에트 문학계를 빛낸 작가들의 유골이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 페레젤키노를 두고 과거 문인들에게 유일했던 <고요의 안식처>라 불러도 좋을 법하다. 사상과 창작의 자유를 억압받던 이들도 이곳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하였으며 실례로 사상가 예프투센코(Evtusenko)는 소비에트 작가 연맹의 서기관들과 거리에서 조우하며 때로는 익살을 나누고 때로는 상호 비방을 하고 욕설을 퍼붓는 등 여러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곳의 대표적인 박물관으로는 <의사 지바고>의 저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박물관, 추코프스키 박물관, 오쿠자바 기념박물관 등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두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의사 지바고>가 머물다 간 소택지-파스테르나크 박물관

글을 쓰는 문인들에게 있어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창작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라 했던가. 붓을 꺾고 서재를 불 지르고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던 검열의 잔혹함을 소비에트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더러는 절필(絶筆)하고 더러는 죽음으로 응수하고, 그 나머지 중 일부는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개조된 인물로 재탄생되는데, 아무튼 그들이 남긴 유산들은 마치 역사 교과서처럼 후대에 이런 저런 교훈을 가져다준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위시하여 손에 꼽기 힘들 만큼 많은 대문호들이 배출된 나라가 러시아다 보니 모스크바 인근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흔히 철혈의 소비에트 검열제도로 인해 당대에는 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키와 마야코프스키, 망명 작가 부닌, 희대의 불세출 불가코프 등 이른바 러시아 문학의 은세기(銀世紀)를 잇는 아크메이즘과 미래주의를 이끈 수장들이 소비에트 역사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파스테르나크란 이름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지만 ‘라라의 테마’와 우랄 산맥에 자리한 유리의 성 ‘유리아틴’,  혹은 멋진 콧수염의 미남배우 오마 샤리프로 인상 깊은 영화 <의사 지바고>를 떠올릴 수 있는 독자라면 이내 작가의 이름에 친숙해 질 것이다.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던 그가 태어난 곳은 1890년의 모스크바였다. 산문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두각을 보였던 그였기에 당대 그의 독특하고도 난해한 형식을 그대로 본 딴 모방시들이 유행하였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파스테르나크는 페레젤키노의 역사에 누구보다 큰 족적을 남긴 작가다. 이곳에서 그가 살기 시작한 것은 실제적으로 1936년부터이며 임종 또한 이곳에서 맞았다. <의사 지바고> 또한 이곳에서 마무리 되었으며 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는 과업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반면, 본국에서는 <의사 지바고>의 출판이 금지되어 이탈리아에서 초판을 발행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이와 맞물려 소비에트 작가 동맹에서 제명되는 등 그의 순수한 예술적 세계는 정치적 분쟁 속에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조국을 떠날 수 없다는 의지를 서기장 흐루쇼프에게 직접 전하여 추방을 면한다. 그 대가로 노벨상 수여를 포기하여야 했음에도 말이다. 이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그였기에, 1960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전 러시아의 문학 애호가들이 이곳 페레젤키노로 몰려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하관을 앞두고 그의 시와 작품들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소택지에 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1986년부터이며 공식적으로는 1990년부터 개관하였다. 박물관 입구의 오솔길은 낙엽으로 가득 차 애수를 자아냈으며, 찬 기운에도 아직 푸르름을 잃지 않은 정원을 가득 매운 각종 과수(果樹)와 초목들은 인간과 자연을 융합하고자 했던 그의 창작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였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내부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편히 잠든 침대는 겨우 한명이 머리를 누일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으며, 동료 작가들이 찾아와 이따금 담화를 나누곤 하였다는 부엌은 화려한 장식을 대신하여 설치된, 빛이 잘 스며드는 넓은 유리창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박물관 2층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음률은 지나가던 방문객들에게 마치 한편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창작적 자유를 향한 그의 비상(飛上)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파스테르나크 박물관은 지상에서의 영광을 뒤로 하고 오로지 창작에 몸을 사른 작가의 영혼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안내자처럼 다가왔다.

마음이 쓸쓸해지는 이 가을에 파스테르나크의 시 한편으로 가슴을 따듯하게 데워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을 노래한 음유시인, 불라트 오쿠자바의 기념박물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문학의 한 장르로서 자리 잡지 못한 ‘음유시’(혹은 노래시-필자 주)가 러시아에서는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인기를 끌었다. 바르드(Бард)라고도 불리는 음유시인들 가운데 브로드스키(Brodskij)와 비소츠키(Vysochkij), 한인 출신 율리 김(Ully Kim) 등은 해마다 기념제가 열리 정도로 그 명성이 높은데, 그 중 불라트 오쿠자바(Bulat Okudzava)는 어느 누구와도 견주지 못하리만치 우뚝 서 있다. 

1924년 모스크바에서 그루지아인 아버지와 아르메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을 카프카즈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며 보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라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의용군으로 입대했는데 무전병으로 근무하다 그만 상처를 입고 만다. 이후 1950년에 아버지의 고향인 그루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대학에 입학한다. 바로 이 기간에 그의 첫 번째 시집이 발표된다. 졸업 후 모스크바 인근으로 거처를 옮겨와 교사로 생활하면서 그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저작 가운데 그루지아에 대한 향수와 정서가 담긴 시들이 많은 것은 군 생활과 대학 시절간 느낀 아버지의 향취로 인한 것이리라.

전쟁 후 그가 이곳 페레젤키노에 머문 시기는 대략 1960년대에서 1980년대라 할 수 있다. ‘다브젠코 거리 11번가’로 유명한 이곳은 원래 오쿠자바의 별장으로서 본채와 별채, 그리고 작은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에는 오쿠자바가 숙식과 창작을 하던 집무실과 침실이 있으며, <친구들을 위한 박물관>이라 불리는 별채에는 기념제를 위한 간이 콘서트홀과 그의 흉상이 마련되어 있다. 여름에는 통나무 의자들과 단상이 놓여있는 정원에서 그를 기리기 위한 각종 음악제가 열리기도 한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의 긴 활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오쿠자바가 이곳에서 보낸 실제적인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트리아와 영국, 불가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등지로 끊임없이 순회공연을 다녔던 터라, 창작 혹은 휴식 이 두 부분이 필요할 때만 이 별장에 머물렀을 것이다. 아마도 창작을 위한 모태와도 같다 할까, 시를 비롯한 드라마, 번역물 등 대부분의 그의 노작들이 이곳에서 잉태되었다.

비록 조국 땅에서 눈을 감지 못한 채 파리에서 쓸쓸히 잠들었지만 오쿠자바의 서정적인 선율은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인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지지 앉고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