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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러시아 한민족 교육의 보고 - <모스크바 1086 한민족학교>

 

‘글로벌리즘(globalism)’의 확산으로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근린(近隣) 생활권에 들어와 있다. 지정학적으로 인접한 근동(近東) 아시아 국가뿐만 아니라,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국가들은 이미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이웃사촌’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사회적 요인으로 현대인들은 다문화, 다변화, 다민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삼다(三多)사회’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이로 인해 우리민족 고유의 훌륭한 전통마저 상실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처럼 민족적 특성이 약화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상(地上) 만여 킬로 떨어진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지에서 끊임없이 우리민족의 위대한 발자취를 찾아 후세에 전파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모스크바 1086 한민족학교의 교장 엄 넬리(70) 여사이다. 재러 교포 4세로서 강제 이주와 민족 차별,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안위도 아랑곳 않고 꿋꿋이 시대와 맞서 싸워온 엄 넬리 교장. 그녀의 개인사는 이미 한 개인의 일화가 아니라 한민족 역사의 일부라 할 수 있겠다. 질곡의 역사 속에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고 당당히 러시아 최우수 교장 상을 수상하며 전 러시아에 한민족의 우수성을 떨친 엄 넬리 교장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민족의 기상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한민족의 뿌리 지킴이-1086 한민족학교

100여 민족과 1억 5천의 인구가 살고 있는 러시아는 지상 최대 영토를 자랑하는 국가인 만큼 지역적 특성도 다양하다. 러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지만 각개 민족의 토착어가 지방에서 통용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구(舊)소련의 일부였던 독립국가 지역에서 이동해 온 이주민들로 언어 질서는 더욱 복잡하다. 이러한 정황 속에 한민족학교에서는 한국어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해 학생들에게 최우선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지역별로 학교에 번호를 매기기 때문에 한민족학교의 공식 명칭이 <1086>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부여된 번호와 상관없이 이곳은 러시아내 최우수 학교로 명성이 자자하다. 러시아에는 교육정책상 초중고 과정이 통합된 슈콜라(школа-공립학교 개념)라는 학교기관이 있어 이곳에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육 받는다. 한민족학교 또한 슈콜라 가운데 하나인데, 이곳에서는 50여 민족의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으며, 그 수만 해도 600여 명에 이른다. 한민족학교의 전체 학생 가운데 65%가 재러 동포(고려인)에 해당하며, 초등학교 과정만 러시아인 학생 수가 많을 뿐, 중고등학교 과정은 한민족 학생 수가 절대적이다.

개개 학생들은 정규과목인 한국어 외에도 특별과목으로 부채춤과 예절 교육, 태권도와 민요 등을 배우며 우리민족의 전통을 답습(踏襲)하기도 하는데, 이는 민족교육에 바탕을 둔 학교설립 이념이 훌륭히 반영되고 있음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한민족학교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낯선 땅에 정착시키며, 자라나는 한민족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민족사관을 고취하는 터전과도 같다. 필자가 학교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 새해맞이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벽면 곳곳에는 새해인사가 가득하였고 학생들은 명절행사 연습을 위해 삼삼오오 짝지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학교와 달리 우리학교는 음력 1월1일을 공식 휴무일로 정하여 수업 대신 전교생이 모여 설 잔치를 엽니다. 우리의 훌륭한 미풍양속을 학생들에게 전파하는 것보다 더 큰 교육도 없다고 봅니다. 결코 잊혀 져서는 안 될 우리 문화이기에 학생들은 한복과 세배, 명절음식을 몸소 체험하며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식사 예절을 현장에서 직접 지도하던 엄 넬리 교장은 우리민족에 대한 뿌리 찾기 교육을 무엇보다 강조하였다. 그러다보니 수업의 시작과 마침을 알리는 종소리마저 민요인 아리랑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스크바 시민 누구라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1086 한민족학교의 설립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더더욱 오늘날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한국을 방문한 후인 1992년에 처음으로 학교를 열었습니다. 우리학교는 모스크바 남쪽 주거지역에 위치한 터라 주변 환경이 비교적 조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지나다니던 러시아인들이 ‘머리 검은 놈들을 위한 학교가 무슨 필요냐’며 돌을 내던지곤 했죠. 그만큼 민족에 대한 차별이 컸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난도 우리에게는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습니다. 학교설립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각오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죠.”

소비에트 시절에는 민족에 대한 교육이 엄중히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1990년대 초 개혁이 일어나자마자 엄 넬리 교장은 한민족을 위한 학교 설립에 착수하였다. 이후 인종 차별과 대내외적 압박 등 갖가지 방해요인에도 굴하지 않고 부단히 학교를 키워 나갔는데, 그 결과 전체 공립학교 중 최우수 학교표창과 40여 민족학교 가운데 최우수학교 표창을 수여받았으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8대 민족학교에도 선정되었다. 심지어 모스크바 정도 850주년 때는 우리의 부채춤으로 대통령이 집무하는 크렘린 궁전에 초청받기도 하였다.


러시아 한인 교육계의 대모-엄 넬리 학교장

오늘날 1086학교가 모스크바 지역의 3천 500여개 국공립 학교기관 가운데 으뜸으로 자리하기까지는 그야말로 엄 넬리 학교장의 공헌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교장’이라는 직분 보다는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항상 학생들과 함께 서있는 그녀는 등교시간이면 아직도 일일이 학생들을 맞이하며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부르고는 인사를 건넨다.

1940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그녀는 7남매 중 넷째 딸이었다.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으로 부친은 북한 체재기간 중 희생당했으며, 힘들게 북한을 빠져나온 그녀는 1956년에야 모스크바에 돌아올 수 있었다. 북한에서도 차별을 당하고 소련 인들에게도 차별 당했던 그녀는 학문을 통해 서러움을 달랬는데, 그녀의 강한 집념은 실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였다. 모스크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생물교사를 거쳐 교감 직에 오를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32세.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연구업적들에 대해 면밀히 검증받은 후 만연에나 봉직할 수 있을 교장 직책에 교감승진 이후 3년 만인 35세에 오른다는 것. 이 모든 것이 학문을 향한 그녀의 열정이 없이는 애당초 불가능하였다.   

배움에 대한 그녀의 도전정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엄 넬리 교장은 53세 되던 해인 1992년에 한민족학교를 설립한 이후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말을 공부해 왔다고 한다. 물론, 당시에도 이미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얻었던 그녀가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에 이토록 자국어 공부에 열심이었던 데는 말 못할 슬픈 사연이 담겨 있었다. “나에게 1991년은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한 해였습니다. 그해 겨울 러시아로 이주한 이후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았지요. 그때는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습니다. 정말이지 공항을 나서서 조국의 경치를 바라보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곳, 바로 그곳에 내 두발로 서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본적은 없었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은, 동무들과 언제가 거닐어 본 듯한 이곳. ‘아, 이런 것이 바로 조국이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더욱 크게 느꼈습니다.” 공항에서 느낀 따뜻한 조국의 인상에 벅차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장시간 눈물만 쏟아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감동하여 당시 동행하였던 러시아 교육부 차관은 본국으로 귀국하면 한민족학교를 설립하는데 전적으로 조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러시아로 귀국한 후 그녀는 밤잠을 설쳐가며 본격적으로 학교 설립에 착수했다. 장화와 안전모를 신고 현장에서 직접 진두지휘를 하는가 하면, 아직까지 완공되지 않은 학교건물에 늦게까지 남아있다 밤을 새는 경우도 있었다. 조국에 대한 향수가 뼈 속까지 파고들어 학교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한시도 편하게 쉴 수 없었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한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우리말을 배웠어요. 한국 방문 시 한국말을 할 줄 몰라 조국 동포들과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던 게 아직도 한처럼 사무칩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결코 한 순간도 우리말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죠.”

여기에 멈출세라 그녀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 최고애국훈장협회는 엄 넬리 교장에게 애국훈장을 수여하였는데, 이는 한민족에게 수여되는 1호 훈장이라고 한다. 또한 59세 때 러시아 정부로부터 최고박사인 ‘독토르’(한국의 박사학위보다 훨씬 위상이 높다-필자 주) 학위를 수여받기도 하였으며, 만학도의 결과물로 11권의 한글교육 교재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그런 그녀가 현재 가지고 있는 최고의 근심거리는 다름 아닌 후계자 양성. “지금 우리학교는 학생 수에 비해 공간이 여유치가 않아 또 다른 한민족 학교를 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세대를 지켜나갈 지도자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죠. 조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학교를 책임지고 맡아서 운영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한국어에 대한 열의와 구사실력도 아직 미비합니다. 이러다보니 이 나이에 아직도 모든 부분을 일일이 지도하고 점검하여야 합니다.”

이처럼 한평생을 민족교육에 바쳐온 엄 넬리 교장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주변 동료들과 제자들은 그녀의 뜻을 계승하여 오늘도 쉼 없이 한민족 뿌리 찾기에 여념 없다.


멈추지 않는 한민족의 신화

민족교육과 한글교육확산에 대한 공으로 조국으로부터 무궁화 훈장과 국민훈장을 수여받은 그녀가 칠순의 나이에도 이토록 민족교육에 욕심을 내는 데는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뿐, 조국을 향한 사랑과 ‘핏줄의 무서움’이라 할까. “소비에트 때는 모스크바 전체 교장단이 한자리에 모여 ‘자아비판’하는 시간이 있었지요. 한인 교장은 나 혼자라서 단 한번이라도 문제가 생기게 되면 바로 눈에 뜨이기 마련이죠. 나로 인해 우리 한국인들 전체가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물고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그녀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현재까지 1086학교는 초등학교 입학 경쟁률이 10대 1을 훌쩍 넘기는 명문학교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처럼 엄 넬리 교장은 한민족의 위상과 교육이라는 두 가지 열쇠를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언어와 관습은 한 민족을 대표하는 고유영역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다른 민족들과 구분 짓는다. 특히 서양인들에게 신비감을 가져다주는 독특한 동양의 문화는 러시아에서도 많은 관심사가 되고 있는데 유독 우리의 아리랑과 부채춤이 러시아인들의 흥미를 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도 계승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일 터. 2009년 한민족의 자랑찬 도약과 성공불패의 신화를 한민족학교가 기필코 이어나갈 것이라 기대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