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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자료/러시아 아동극 자료

러시아 아동문학의 발자취를 찾아서 - 동화작가 추코프스키


일찍이 소파(小波) 방정환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두고 나라사랑에 빗대었다. 선생의 활동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전통 유교사상에 의해 경시되었던 아동인권 보호에 경종을 울렸으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어린이'라는 단어를 창조해 국가의 장래가 그들에게 달려있음을 각인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린이에게 늘 책을 가까이 할 것을 선생은 당부하기도 하였는데, 곧 책을 통해 얻어지는 문학적 소양과 정보가 바로 어린이들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 아동문학은 소설(小說)과 연극(演劇), 동시(童詩)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에서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아동교육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작품의 질적, 양적인 성장이 주된 요인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동문학(兒童文學)'이라는 고유한 장르가 만들어내는 독창성이 현대사회에서 대대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에 더욱 그러하다. 세계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 모스크바에서 필자는 소비에트 아동문학의 대표자인 추코프스키의 영지를 찾아가 보았다. 이곳에서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전 유럽에 걸쳐 이미 광범위하게 소개된 바 있는 추코프스키의 저서들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으로 향하는 '문턱'과도 같은 시기인 6월의 시작과 함께 필자는 본지의 독자들에게 러시아 아동문학계의 소목장이 코르네이 추코프스키(Kornei I. Chukovskij)를 소개하고자 한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 독한 개그와 독한 정치가 만연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잠시 떠나, 아련한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동심들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보자. 


동심을 향한 추코프스키의 창작 세계

소비에트 작가이자 아동문학가, 번역가이기도 한 코르네이 이바노비치 추코프스키(본명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코르네이추코프)는 1882년 3월 31일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수많은 아동들에게 꿈을 심어준 대작가였지만, 정작 추코프스키 본인은 우울한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다. 대학생이었던 추코프스키의 아버지 엠마누엘 레벤손은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던 폴타바 지방의 농노 출신인 에카테리나 코르네이추코바와 동거하며 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버려둔 채 떠났으며, 추코프스키의 어머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오데사로 이사하여야만 하였다. 오데사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유년기를 보냈던 추코프스키가 5학년이 되던 해, 그는 갑작스레 학교로부터 퇴학조치를 통보받는다. 다름 아닌, 낮은 신분계급이 억울하게도 퇴학의 사유가 되었던 것이다(실제로, 그가 가지고 있는 부칭(父稱)인 바실리예비치도 친부가 아닌 대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만년에 추코프스키는 계급차별 속에 상처받았던 유년기에 대한 회상을 담아 <은빛 문장>(1961)이라는 작품을 창작하는데, 이는 당시 그가 겪었던 고초들을 문학으로 승화한 대표작으로 불린다.

1901년부터 추코프스키는 오데사 신문에 이런저런 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당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블라디미르 쟈보틴스키가 크게 영향을 미친 바, 이때부터 그는 언론인으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문학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라 할 수 있다. 실례로, 1903년 추코프스키는 런던에서 특파원 생활도 하였으며, 2년 뒤 러시아에 돌아와서는 1905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풍자적인 경향을 띤 잡지 <신호>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잡지에 기고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쿠프린과 솔로구프, 테피와 같은 저명한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추코프스키는 1906년에 핀란드 령인 쿠오칼라로 옮겨와 약 10년간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서구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여 발표하면서 사회적 입지를 점차적으로 쌓아나갔다.

추코프스키의 명성을 널리 떨친 아동문학 분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곧 그가 비평가로서 이미 유명해진 이후에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그는 비평가로 활동하였는데, 혁명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16년에 선집<욜카>(크리스마스 트리를 의미-필자 주)를 발행하였으며, 곧 이어 자신의 첫 번째 이야기인 <크로커다일>을 창작하였다. 이를 필두로 하여 아동 소설 <모이도드이르>(1923)와 <타라카니셰>(1923), <무하-초코투하>, <바르말레이>, <전화기> 등과 같은 걸작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아울러, 러시아에 키플링의 소설과 <로빈슨 크루소>,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이 번역되어 출판 된 것도 모두 번역가로서 왕성한 활동의 펼친 그의 공로라 할 수 있다.

1930년대는 추코프스키에게 역경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사회는 아동을 위한 그의 시작품들을 준엄히 심판하였으며, 당과 문단의 몇몇 비평가들은 더 이상 그의 작품이 발표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 와중에 더욱 슬픈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1931년 그의 딸인 마리아가 심각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7년이 지난 1938년에는 그녀의 남편인 물리학자 마트베이 브론슈테인마저 총살당하였다. 이러한 비탄의 세월을 보낸 후에 추코프스키는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겼다. 페레젤키노 별장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의 일. 이와 같은 갖은 역경 속에서도 그는 창작에 끈을 놓지 않았는데, 페레젤키노 시기에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삶처럼 살아있는>(1962)이 나온 것도 바로 고난 속에서도 붓을 꺾지 않았던 작가의 노고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이처럼, 비록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 속에서 자랐을지라도 추코프스키는 피어나는 동심(童心)들에게 꿈을 심어준, 이른바 러시아판 '소파 선생'이라 할 수 있겠다.    


아동문학의 걸작 <의사 아이볼리트>를 펼치며

추코프스키 박물관 옆에는 연노랑 페인트로 칠해진 아담한 아동도서관이 있다. 이곳에는 수백여 편에 달하는 추코프스키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아동문학의 대표작들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벌써 40년째 도서관을 관리해 오고 있다는 할머니 도서관장께서는 한층 부드러운 음색으로 일일이 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먼 길을 찾아온 이방인들을 위해 특별히 <의사 아이볼리트>라는 작품을 꺼내 흔쾌히 읽어주었다.

선량한 수의사인 아이볼리트와 그의 아프리카 모험담을 골자로 하고 있는 동화 <의사 아이볼리트>는 영국의 저명한 작가인 휴 로프팅의 원저를 추코프스키가 개작한 이야기 소설이다. 즉, 원저 <닥터 두리틀>이 아이볼리트의 전형인 셈이다. 하지만 추코프스키는 원저의 번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배경과 등장인물에 대한 대폭적인 개작을 통해 아동들을 보다 큰 상상력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의사 아이볼리트는 추코프스키의 연작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야기 속에서 아이볼리트는 아프리카에서 발발한 원숭이들의 질병 소식을 듣고 곧 그곳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그러나 주변 방해꾼들의 갖은 모략으로 인해 일생일대의 모험을 여러 차례 경험한 후, 고래와 독수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현지에 도착한다. 그의 치료법은 가히 기발하다 할 수 있다. 초콜릿과 고골-모골(계란과 시럽, 럼주를 석은 음료)을 복용하게 하여 병을 낫게 하는가 하면, 체온계의 칸 사이를 넓혀 주은주가 낮아지게 하는 그의 치료법 덕분에 동물들은 다시 건강을 찾게 되기도 한다.  

실제 이 작품의 명성은 수십 편에 걸친 만화와 아동영화를 생산해내기도 하였다. 1960년대 최고 배우이자 연출가인 올레그 예프레모프(Oleg Efremov)가 <아이볼리트66>이라는 영화에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열연을 펼치기도 하였으며, 1938년에도 동명의 작품이 상영되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이처럼 <의사 아이볼리트>는 현재까지도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동문학 작품으로 남아있다.


아동들을 위한 축제의 장 - 추코프스키 박물관

앞서 언급했듯, 추코프스키가 모스크바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87년이라는 짧지 않은 생애 동안 실로 많은 지역을 유랑하였지만, 유독 페레젤키노의 별장은 그에게 작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자 영혼의 안식처로 다가왔다. 문인(文人)촌의 숲속에 위치한 그의 저택은 얼핏 보더라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내부 장식이라야 사면을 둘러싼 책들과 초라하리만치 소박한 세간 살림이 고작 전부이다. 화려하고 널따란 책상과 금장의 필기구들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으며, 서재를 가득 메운 책들과 낡은 가운, 몇 편의 유화 작품만이 단출하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당 입구에는 마치 집을 지키는 수호신과도 같이 아이들의 신발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 너머로 긴 숲길이 나 있었다. 이 나무에서 출발하여 약 100여 미터 정도 숲길을 걸어 들어가다 보면 간이 무대와 긴 벤치들이 즐비한 공연장이 나오는데, 바로 이곳에서 매년 아동들을 위한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마침,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는 페스티벌 기간 중이어서 추코프스키 동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로 분장한 배우와 유명 시인들이 각지에서 찾아온 아동들에게 그의 작품을 한껏 낭송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왔던 사실은, 낭송이 시작되자마자 시끌벅적했던 행사장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고 모든 아동들은 낭독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듯 살아있는 현장에서 체화되는 조기교육이 몸에 베다보니, 오늘날 러시아 문학이 가지는 저력 또한 바로 이러한 단초(端初)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이곳에서 추코프스키가 행한 거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성서를 아동들을 위한 이야기로 엮어내었다는 것. 이 작업을 위해 여러 명의 작가와 비평가들이 참여하였는데, 실제 소비에트 정치계에서는 종교에 대한 인정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창작 작업은 갖은 어려움 속에 진행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찬 노력의 결실로 <바벨탑과 다른 고대의 전설들>이라는 저서가 추코프스키 서거 1년 전인 1968년에 발행되었으며, 2001년에 들어서는 <바벨탑과 성경의 다른 전설들>이라는 제목으로 재판되기도 하였다. 

페레젤키노 별장에서 쌓은 또 다른 업적은 아동 언어에 대한 연구이다. 아동의 언어를 연구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작은 아이들>이라는 저서를 통해 고유한 아동들의 언어체계에 관해 고찰한 바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아동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상호간 대화를 전개하는데, 아동 언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초동(樵童)의 심정으로 회귀하여 그네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융화되고자 하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추코프스키는 전하였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과 함께 박물관 숲길을 돌아서며 필자는 이런 생각을 문득 해보았다. 상호단절과 무관심의 팽배로 날로 병들어 가는 우리사회에 바로 이 '타인(他人)의 언어에 대한 이해의지'가 한편으로는 최고의 치유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