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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러시아 우랄산맥 기행<1>


러시아 우랄산맥 기행<1>

우랄의 고도 페름을 가다

 

글 및 사진 제공·박정곤

 

러시아를 동과 서로 가르는 두 개의 산맥을 꼽아보자면 우랄과 알타이를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유럽과 동양을 경계 짓는 우랄산맥은 러시아의 정신이자 문명의 발상지로 기념되고 있다. 남부지방은 저지대와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는 반면 북부지방은 해발 1800여 미터가 넘는 험준하고 높은 산들로 지세를 이룬다. 이에 비해 중부 우랄 지역은 그 경사가 비교적 완만해 예로부터 교역과 문화의 중심으로 역할 해 왔는데, 그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예카테린부르크와 페름이다. 여기에 더할세라, 우랄 주변을 둘러싸며 널리 펼쳐진 타이가 숲은 서로 경합이라도 하듯 정상의 높이가 비등한 아름다운 산맥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수자원의 보고인 카마(Kama)강, 페초라(Pechora)강, 예니세이(Enisei)강 등이 이곳에서 합류되며 그야말로 더없는 장관을 이룬다. 이 즈음 되다보니 인류의 조상들이 문명의 터전으로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 더 이상의 설명 없이도 잘 이해가 되었다.

오늘날 우랄은 개발과 보존, 그리고 다민족 문화의 집성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이곳에는 수십여 소수민족이 사냥과 낚시에 의존하며 전통방식 그대로의 습생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들은 현대적 문명의 편리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네의 전통 방식을 따르고 있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금번 행해진 필자의 탐사 목적은 먼 조상의 얼이 담긴 우랄산맥의 내면을 현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때 묻지 않은 삶을 통해 조금이나마 체득해보고자 하는데 있었다. 역으로 표현하자면, 이민족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어린 접근과 단순한 관찰을 넘어 그들의 일상에 투영된 우랄의 풍습을 통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을 돌아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탐사에 앞서 장대한 대자연 앞에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나름의 반성과 지향의 장을 만들어 보고자 했던 필자의 뜻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설령 부족한 탐사 성과일지언정 혹자에겐 우랄을 알아가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글을 열고자 한다.

 

 

다민족, 다문화의 공존(共存)체 - 우랄산맥

일찍이 우랄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분포하고 있었으니, 북방에서 유목을 하는 유목부족과 중부 산악지역의 수렵 부족, 그리고 중남부와 남부 지역에서 산림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부족들로 나뉜다.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북방 최상단에 위치한 극우랄 지역의 네네츠(Nenets)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랄 동북부지역에는 한티(Kxanti)와 만시(Mansi)족이, 서북부 지역에는 코미(Komi)가, 중부지역에는 카자키(Kazaki)와 타타르(Tatar)인들이 분포하고 있다. 예카테린부르크를 중심으로 그 하단 지역에는 러시아인 외에 바슈키르(Vashkir)와 일부 우크라이나(Ukraine)인들이 거주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지역은 단연 중남부 지역이라 하겠다.

일찍부터 중부 우랄 원시림 인근에는 염소와 양을 키우는 유목민들이 살았는데 이들은 외형적인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유목의 특성상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기에 농경생활을 하는 민족처럼 정착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자연스레 우랄 땅은 오래 동안 정해진 주인 없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중세 러시아를 거쳐 오며 이곳은 큰 변화를 겪는다. 곳곳에는 공장들이 건립되었으며 동양에서 수입된 차는 이곳을 거쳐 수도 모스크바로 전해졌다. 남북으로 길게 흐르는 강들도 곳곳에 즐비하여 아랍문화와 러시아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도시 주변에는 우랄의 천연광물을 얻고자하는 연구소와 탄광이 들어섰으며 뱃길을 이용하여 원자재를 운송하는 수로가 발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다양한 민족들은 자연스레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오늘날 중부 우랄이 다민족 집산체로 알려진 데에는 바로 이 산업의 발전이 큰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랄이 가져다 준 천혜의 자연 해택만을 통해 유목 생활을 하지 않고 일찍 이 땅에 정착한 민족들이 있으니 바로 숙순 지역의 마리(Mari)족과 타타르족이다. 이들 민족은 서로 숲과 강을 공유하며 다툼 없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필요만큼 취하여 왔다. 타타르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카자키의 동방원정으로 인해 피를 볼 수밖에 없었던 남부지방과는 달리 이곳은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차례도 전쟁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 때에도 이곳에서는 기억에 남을법한 전투가 거의 없었다. 이처럼 중부 우랄에서 마리와 타타르는 러시아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빈번한 교류를 맺고 있으니 과히 흥미로운 곳이 아닐 수 없다.

 


민속춤과 노래의 진수 - 마리(Mari)족과 타타르(Tatar)족

마리 민족은 원래 볼가(Volga)강 하류 지역인 마리엘 공화국에 정착하며 살고 있었다. 강을 등에 업고 살아가던 민족이라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생김새는 러시아인과 거의 구분이 없다. 마리엘 공화국에서 이곳 숙순 지역까지는 약 8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도로가 그다지 잘 발달하지는 못한 편이라 차량으로 이동하는 데는 상당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지역 향토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마리의 정확한 이주 역사를 알 수는 없으나 강에서 나온 수산자원으로 식생활을 영유해 오던 부족민들이 보다 풍부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우랄 쪽으로 이동을 하였다 한다. 이동 중 마리 부족은 산과 강, 숲이 어우러진 복토를 찾게 되었는데 바로 그 땅이 숙순 지방이며 그때부터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러시아인들 보다 훨씬 이전에 시베리아에 정착하여 살아왔던 마리 부족의 인구는 러시아 전체를 합쳐 대략 64만 명가량이지만 이곳 숙순에 거주하는 마리 부족의 수는 불과 몇 백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을 아직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집집마다에는 벽돌과 흙으로 만든 페치카가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러시아인들의 것과는 차이점을 보였다. 가령, 내부가 길게 형성되어 혹은 잠자리로도 가능한 러시아 페치카와 달리 마리 부족의 페치카는 난방과 조리도구로만 사용되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 걸쳐 불을 지피다보니 이들의 일상은 장작과 땔감을 수집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겨울에는 한길을 넘기는 눈으로 인해 땔감은 고사하고 숲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인지라 봄이 되면 다음 겨울이 오기까지 거의 매일 숲에서 땔감을 모아놓는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하루의 끝자락 즈음 마리의 여성들은 독특한 모임을 가졌다. 인구 3백의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이곳에는 민속 문화 센터가 존재하였다. 대부분 예순을 넘긴 할머니들이 주류지만 이들은 전통의상과 장신구를 잘 정비해 두었다가 오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여섯 명으로 구성된 마리중창단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식의 음계에서 벗어나는 듯 독특한 창법이 인상적이다가도 이내 흥겨운 멜로디로 이어져 더없는 친근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노래의 길이도 각양각색, 몇 소절로 끝나는 단순한 형식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장장 25절에 달하는 장가(長歌)도 있었다. 실제로 마리 민요를 수십 년간 불러온 한 할머니께서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넘어갈 때까지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긴 노래도 있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 곳 마리 부족의 정겨운 노래만큼이나 객들의 시선을 이끄는 것이 또 있었으니 이들의 전통의상이다. 여성용 의상 앞에는 다양한 연대의 동전들이 달려 있었는데, 그 연대는 백여 년을 훨씬 넘긴 것에서부터 십여 년 전 발행된 것에 이르기까지 그 연대가 다채로웠다. 특히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할 때면 동전의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자연스레 악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여성용 의상의 색상이 화려한 붉은색 계통이라면, 반면 남성용은 흰색 계통이 많았다. 또한 결혼식 의상은 남녀 모두 검은 계통이어서 장엄함을 더하였다. 실례로 둥글면서 앞쪽으로 솟아 난 검은색 예식용 모자는 우리고유의 단아함의 미(美)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처럼 백색 피부에 푸른 눈을 가진 그들의 외모 뒤에는 왠지 모를 동질성이 한껏 느껴졌다.

마리 부족의 문화가 보다 섬세하고 여성스럽다면 타타르의 문화는 보다 남성적이고 활기로 넘친다. 모스크바에서 약 800여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타타르 공화국의 카잔을 중심으로 고유한 문화를 꽃피운 타타르는 16세기 이반 4세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카잔한국의 위상을 떨쳤다. 러시아인 다음으로 연방 내에서 인구가 많은 타타르(550만)는 러시아에 복속된 후에도 그들은 고유의 이슬람 문화를 지켜나갔는데 이곳 숙순의 타타르인들 또한 일상의 대부분을 종교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였고 끝을 맺었다. 종교적 특성상 여성들의 활동은 보다 제한적이었으나 전통 춤과 노래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거의 헌신에 가까웠다. 마리 부족과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이들은 서로서로 오가며 정기 콘서트를 열기도 하였다. 터키 계열의 외형에 마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지만 콘서트 장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민족과 인종을 떠나 모두 하나였다.

또한 마리 부족의 고유 음식이라는 샨기(Shangi)를 이곳에서도 맛볼 수 있었는데, 숙숙 지역의 대부분이 감자농사를 짓는 탓에 상호 유사한 식문화를 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추측되었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샨기의 맛과 느낌이 우리의 감자전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 양손바닥보다 넓은 크기에 도톰하면서도 동글게 펼쳐내어 먹기 좋고 보기 좋게 만든 외형은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감자전이었다. 이곳 마을 민속 클럽의 장인 지나이다 씨는 6월에 행해지는 ‘사반투이’(Savantui)라는 민속 축제 때 전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다고 말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우리 농군들이 단오 때 민속 경기를 하며 감자전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며 흥을 돋우는 광경이 눈에 선하였다. 하여 미리 짐작하여 보건데, 우랄의 타타르는 길지 않은 시간 후에 우리와 문화적으로 더욱 가까워 질 것이며, 숙순의 축제와 콘서트는 이곳에만 머물지 않고 대륙 끝까지 퍼져 나와 언젠간 우리에게도 선보일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