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툰드라의 딸들 - 대륙의 끝을 디디다

 

툰드라의 딸들 - 대륙의 끝을 디디다


글․박정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던가. 언제나 우리네 일상이 그러하듯 시작한 자는 그 끝을 반드시 매듭지어야 하리라. 지난겨울 북방의 땅 끝, 야말(Yamal)에 첫발을 내디딘 필자에게 북극 한계선(Arctic circle)은 이제야 유쾌한 여정을 열어주었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낯선 곳도 아니며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 다만 계절의 지나감을 담아내고자 했던 최초의 다짐들이 드디어 결실로 다가오고 있음에 어느 정도의 숙연함만 뇌리에 담겨있을 따름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진정 조금만 더 내달리면 이 길고도 먼 기행도 그 정점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오늘도 쉼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창조주가 대지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탄생한 대지가 지구의 여섯 대륙이었다면 그 마지막 창조지는 대륙의 끝, 바로 야말이었으리라. 지난 봄 순록 축제가 한창이었던 야르살레(Yarsale) 마을 인근의 툰드라에서 꼬박 이틀간 33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필자가 도달한 곳은 북극해 남방의 카라(Kara sea)해 인근에 위치한 유리베이(Uribei)강이었다. 정수리 끝 바짝 가깝게 다가온 하늘은 하루에도 수십 번 넘게 변화를 거듭하였으며 잠을 잘 새도 없이 기상은 우리를 툰드라 한복판으로 몰았다. 더러는 얼음 알갱이가 섞인 눈이 내리기도, 더러는 녹아내린 얼음 탓에 강이 범람하기도 하였는데 위험의 수위를 측정하자면 아마존의 밀림과 범접할 정도였다. 더욱이 백야가 한창이었던 터라 하루 중 해가 지는 시간은 단 1초도 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진정한 백야를 경험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이곳에서 필자가 만난 이들은 툰드라의 맹주 네네츠(Nenets) 여인들이다. 남자들도 견뎌내기 힘든 툰드라의 세태 속에서 이 곳 여인들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가장 늦게 잠이 든다. 자동차, 건물, 인간, 혹은 우리에게 흔한 소나무 한그루조차 끊임없는 지평선 아래 어느 한곳에 보이지 않는 새하얀 황무지에 버려지는 두려움을 뚫고 필자는 살아있는 네네츠 여인들의 일상을 툰드라의 여름 풍광에 담아 독자들에게 생생히 전하고자 한다.  

 


요를클라와!(Yorklawa) - 툰드라 일과의 시작

툰드라의 여름은 정오부터 시작된다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내내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없다보니 언제가 아침이고 언제가 저녁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렴풋이 아침의 시작을 인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지 않는 해가 동쪽을 향한 춤의 입구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 이니 말이다.

이곳 툰드라에서는 특별히 마련된 이동로가 없다. 유목이 생활화된 이들에게는 조그만 언덕, 지나치기 쉬운 나무 한그루,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조차 않는 야생 딸기 열매들조차 방향을 인지하는 이정표가 되겠지만 도시문명에 익숙한 필자에겐 사방이 한곳이라 해도 거짓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 툰드라의 1킬로미터는 가히 도심의 10킬로미터와도 같았다. 그만큼이나 험준하고도 위험하다. 곳곳에 파인 구덩이와 진흙 언덕, 빠른 유속에 폭이 널따란 강들,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처럼 경사가 가파른 골짜기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 차라리 이곳에서는 겨울이 오히려 낫다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극심한 추위를 빼자면 굳게 다져진 눈밭 위로 차량이동이 그나마 용이하기 때문이다. 강물을 타고 이따금 떠내려 오는 유빙(流氷)과 물그레한 살얼음, 거기에 더해진 때 아닌 모기들의 습격. 이처럼 초여름의 맹폭함은 더 이상 형언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러한 기상 여건과는 달리 툰드라에서 7월은 한창 바쁠 시기이다. 5월부터 태어나기 시작한 아기 순록들은 이제 엄마 순록을 따라 북극해를 향해 유목생활을 준비하고 있으며 무리 속에서 이탈하지 않으려 최대한 성장을 앞당기려 노력한다. 이따금 숲을 헤치고 나타나 무리를 헤집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불곰이라던가, 남하를 하다 길을 잃은 북극곰들이 나타나 이 어린 순록들을 헤치곤 하지만 네네츠인들에게는 이조차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이른바 자연스런 '일상'이 되어있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유리베이강을 지나 그 지류를 타고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우리가 만난 이들은 톡차(Tokcha)라는 이름을 가진 네네츠 유목민의 가정이었다. 우리가 도달했을 때 주인장인 톡차 아저씨는 춤에서 6~8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거대한 자연 방목장에서 1500여 마리의 순록을 돌보고 있었다. 이들은 매일 오후 두어 시 가량이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느 누구나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요르클라와!'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순록을 몰기 시작한다. 툰드라에 자유스레 흩어져있던 순록들은 서넛이 짝을 지은 목동들의 외침을 피해 춤으로 보다 가깝게 이동하였다. 이 곳 춤 앞에는 코랄(koral)이라 불리는 그물로 만들어진 순록 우리가 있었는데 목동들은 이곳으로 수백에 이르는 장대한 수사슴들을 몰아왔다. 이때부터 툰드라에서는 하루가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물로 몰려든 순록 떼 가운데에서 남자들은 썰매를 끌 튼튼한 순록들을 골라내어 썰매에 매달았다. 아직 걸음을 배우지 못했거나 야생의 습성이 강해 썰매를 끌기에 역부족인 순록들은 양 갈래로 벌어진 나무 가지를 목 앞에 덧대어 훈련을 받았다. 이렇게 춤 근처로 순록을 몰고 난 이후 네네츠인들은 차를 마시며 잠깐의 담소를 나누었으며 남자들은 다시 방목장으로, 여자들은 본격적인 집안 살림을 시작하였다.       


툰드라의 딸들

여성으로 툰드라에 산다는 것. 아마도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광활한 개활지에 화장실 하나, 세탁기 한 대라곤 어느 하나 없는, 심지어 부엌과 조그만 쪽방조차 없는 곳. 남녀가 다른 잠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며느리와 손자, 손녀, 처자식들을 비롯하여 온 식구가 둥그런 가죽 뿔과도 같은 움막집 춤(Chum) 안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개인적인 사생활이 이루어질 공간과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이들에게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루 내내 나무를 하고 밥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또 저녁 내내 바느질이 이어지는 툰드라의 춤. 이 춤이라는 곳은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다. 특히 이 안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진기한 꿈을 자주 꾸곤 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 같은 움막집 춤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네네츠의 여인들은 신비스러움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툰드라에서 여성의 일은 남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심지어 하루의 길이도 너무나 많은 차이를 보인다. 통상 춤의 아침은 '불을 지키는 여성'의 기상에서 시작된다. 가정마다 '집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조상 인형 혹은 신상(神像)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지키는 여인이 바로 불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툰드라에서 아침의 시작은 더 없이 신성하다 할 수 있다.

여름이 오면 여인들은 춤 안에서 가사(家事)를 돌보거나 혹은 순록 썰매를 타고 나무를 해오곤 한다. 누구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 냉랭한 새벽 공기를 따사롭게 데우는 네네츠의 어머니들. 그들은 난로에 장작불을 피운 후 곧 아침을 준비한다. 모든 음식이 준비되고 난 후에야 일어나는 남자들은 따뜻한 차 한 잔에 몸을 녹인 후 감사를 표하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였다가 사슴 방목장이 펼쳐진 툰드라로 나간다. 다시 말해 툰드라의 여인들이 있기에 이곳의 전체 일상이 순조로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여름은 툰드라의 여인들의 일손을 더욱 바쁘게만 만든다. 

남자들이 모두 방목장으로 나가고 나면, 그 사이 여인들은 호수로 가서 물을 길어 오거나 다시 불을 피울 장작을 구하러 나간다. 땔감을 찾기 위해서는 통상 순록을 몰고 가깝게는 몇 백 미터에서 멀게는 몇 킬로미터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숲 툰드라 지역에서는 땔감을 구하기가 그리 힘이 들지 않지만 북극 쪽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초지 툰드라가 형성되어 있어 낮은 관목이라도 구하려면 한참을 이동해야 할 때도 빈번하다 한다.     

툰드라에서 가장 기초적인 여성의 일인 땔감 구하기와 물 길어오기가 끝나면 가장 상위 단계의 여성의 업(業)인 바느질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나 바느질이 주특기인 툰드라의 여인들은 통상 4-5세가 되면 바느질을 배운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간단히 단추를 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슴가죽으로 집을 만들거나 가죽으로 만든 전통의상인 말리차(Malnicha)와 야구슈카(Yagushka), 그리고 자신들을 위한 인형(Kukla)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여인들의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여름의 진 풍경 가운데 또 하나가 '건조작업'이다. 여인들은 지난겨울에 잔뜩 얼어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 창창한 햇발 아래 말리기 시작하였다. 비단 가죽 의상뿐만 아니라 음식들도 말리는데, 여름이 오면 금방 곰팡이가 슬어버리는 연유로 몇 개월간 먹을 빵들을 모두 꺼내어 얇게 자른 후 바싹 말린다. 그래야지만 오는 가을까지 음식을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툰드라에서는 기나긴 유목여정으로 인해 도회지로의 왕래를 자주 가지지 못한다. 그러기에 한 번에 두 계절을 날 수 있는 음식을 모두 마련한 후 길을 떠난다. 그런 이유로 빵과 차는 이들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순록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이들이 탄수화물을 섭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빵 때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출산(出産)이다. 이들에게 출산은 신성한 일이자 집안의 대사이다. 특히나 일손이 많이 필요한 툰드라에서는 어느 곳보다 가족 간의 신뢰와 협업이 더없이 중요하다 하겠다. 그러다보니 한 가정에 5-6명의 자녀는 기본이다. 이보다 좀 많다고 하면 거의 열 명에 다다른다. 그럼에도 필자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부분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 큰 소리로 다투거나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가 시키고 거기에 순종하는 개념 정도가 아니라 서로 간에 오가는 말도 없이 자연스레 자녀들은 성별에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으며, 스스로의 일을 마치면 조용히 춤 내에서 차를 즐기며 형제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인간적인 호기심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슬쩍 물어보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나, 도회지에서 온 이방인의 무지로는 이해하기 힘들리라 생각한 탓인지 입가에는 감동에 찬 미소만 그저 머금어질 뿐이었다.   

 

북극의 별을 따다

지난 봄 북쪽을 향해 출발했던 네네츠인들. 여름이 정점에 다다르면 북극 한계선을 훌쩍 넘어 그야말로 대지의 끝인 야말의 북쪽 바다에 서 있을 최후의 노마드(nomad), 네네츠인. 그들에게 북극해는 휴식처이자 여름의 끝을 알린다. 이곳에 도달하면 그들은 한동안 순록들을 자유스레 방목시키며 한 달 넘게 휴가를 보낸다. 아이들은 도처에 자리한 청청호수에서 헤엄을 즐기며 여인들은 어린 순록의 가죽으로 털신과 가죽옷을 만든다. 이 시간동안 남자들은 순록 무리의 건강을 돌보며 이들이 부지런히 풀을 뜯을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찾아준다. 이곳에서는 네네츠인들이 '우리 삶의 전부'라고 일컫는 순록들마저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백 킬로미터의 여정 가운데 닥쳐왔던 갖가지 난관들에서 해방되어 평온한 나날들을 보낸다. 이유인 즉, 이후 시간이 얼마 더 지나면 다시 끊임없는 남하(南下)의 여정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년마다 행해지는 남과 북으로 향한 유목. 땅 끝을 향해 달리는 끊임없는 여정. 이러한 유목의 전통이 끊이지 않은 것은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왔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러기에 필자도 다가올 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로 들어서기 전에 더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경이로운 대자연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미리 표하고자 하였다. 대지가 우리를 버리지 않는 한, 하늘이 북방의 실크로드를 허락하는 한,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노마드(nomad)의 지혜를 인간이 망각하지 않는 한 인류의 후손들은 대지의 끝에서 진정한 대자연의 조화를 맛볼 수 있으리라. 그러기에 반년 전 독자들에게 펼쳐보였던 북극의 눈 덮인 겨울 아침에서 출발하여 여름의 오후 녹아든 눈밭 사이로 영롱히 피어난 이슬 찬 툰드라 끝까지 우리는 함께 다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글을 다듬고 있는 이 순간에도 툰드라의 여인들은 어느 한곳에서 제 각자의 일을 묵묵히 행하고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겨울, 북극의 별을 따다 독자들에게 안기는 그날까지 툰드라의 여정은 계속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