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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예술과 문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세계

 


러시아 명작을 말하다(2)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세계

박 정 곤


청년 시절의 쇼스타코비치


눈 덮인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카야 거리를 경쾌한 왈츠 리듬에 몸을 맡긴 채 가벼이 산보하다 문득 4월이 왔음을 알았다. 우리에게는 신록이 움트는 봄의 계절 4월이겠건만, 아직도 무릎높이까지 쌓인 도로변의 눈이 보행에 집중하게 만드는 이곳에선 기나긴 겨울의 더딘 시간 뿐, 그 속에 봄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지하로 군데군데 바이올린과 첼로를 켜며 클래식을 연주하는 거리 악사들의 레퍼토리에 안토니오 비발디의 ‘봄’과 이런 저런 왈츠 곡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보면 모스크바에도 이내 초록의 태동이 시작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유독 붉은 광장과 아르바트 거리의 수준 높은 악사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이 있으니, 바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왈츠’이다. 지루한 일상에 침전된 허울 좋은 문명화와 끝내 타협하지 않고 그 속됨을 지극히 증오하였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y Shostakovich).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넘나들며 음악이란 예술 장르를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게 가꾸어 낸 소비에트 음악계의 연금술사. 당대 최고의 음악가라 칭송받았던 쇼스타코비치는 비단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음악가이자 작곡가라 하겠다.
성큼 도래한 봄의 시작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세계와 그가 창작한 감미로운 선율의 ‘왈츠’에 담아 살포시 열어봄은 어떨까?


1 쇼스타코비치 집 박물관 전경



2 유년 시절의 쇼스타코비치 초상화



3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연주하였던 피아노



4 전쟁기간 중 의용대 시절의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의 생애_ 생가 박물관
기차역을 떠나 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인 네프스키 대로를 끼고 몇 분 정도 걷다보면 마라타 거리를 가리키는 도로 표지가 나온다. 언뜻 보기엔 그저 시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너무나도 태연한 현대적 일상이 묻어나는 곳이지만, 바로 이거리에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 태어나기로 치자면 중심부에서 좀 더 떨어진 포돌스카야 거리의 오래 된 아파트 건물에서 태어났으나, 대부분의 유년, 청년 생활을 이곳에서 영위하며 집중적인 창작활동을 하였기에 페테르부르크의 시민들은 이곳을 마치 그의 생가처럼 여기고 있었다.
1906년 9월 12일 도량형 부서에 근무하던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난 쇼스타코비치는 거의 대부분의 유년기를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다. 그의 세 명의 형제는 모두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하는데, 이르쿠츠크와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수학하였던 피아니스트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이들은 유년기부터 피아노를 익힐 수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작곡과 화성을 공부하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평생의 업을 음악에 두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으며, 특히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제 술탄의 이야기’를 관람한 후 오페라에 매료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음악가로서의 삶은 첫발을 디디게 된다.
1918년 글라주노프의 음악을 통해 작곡에 눈을 뜬 그는 그 해 가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사위인 막시밀리안 슈테인베르크에게 직접 화성과 작곡, 지휘를 사사받는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19년에는 불과 13세의 나이에 이미 기악곡 스케르초 피스 몰(Skercho fis-mol)을 작곡할 수준에 다다랐다. 1923년과 1925년에 각각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피아노과와 작곡과를 졸업한 그는 졸업 작품이자 동시에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 노작인 <교향곡 1번>을 창작하였다. 이어 1927년에는 쇼팽 콩쿠르에서 훌륭한 성적을 얻어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알려나갔으며, 심지어 독일의 작곡가 부르노 발터가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봐 교향곡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교향곡은 독일의 베를린을 필두로 미국을 거쳐 세계 각국에서 연주되어 나갔다.
특히 지극히 러시아적인 감성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쇼스타코비치는 외국의 음악가들과교류하며 자신이 받았던 수많은 감명들을 조국의 색채에 어울리게 재창조해나갔는데, 고골의 동명소설 <코>를 음악화한 오페라 ‘코’가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수 있다.

1930년대 들어 그는 수많은 오페라와 교향곡, 발레곡 창작에 전념하였다. 발레작품 ‘황금세기’,‘ 볼트’를 비롯하여 명작으로 길이 칭송받는 오페라 ‘무첸스크영지의 멕베스 부인’과 ‘교향곡 4번’, ‘교향곡 5번’도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특히 ‘교향곡 5번'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보다 자주 불리는데, 형식주의적 음악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를 향한 동시대의 비판에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끔 만든 대표 곡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이전의 아방가르드적인 세 교향곡과 차이를 보였으며 보다 드라마틱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37년에 이르러 쇼스타코비치는 불과 서른의 나이에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나, 다른 천재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음악 노정도 역시나 순탄치만은 않았다. 실제로 스탈린과의 갈등으로 인해 그의교향곡은 비판을 받거나 시연 금지를 당했으며, 세기의 비극인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정상적인 창작활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 쇼스타코비치는 몸소 의용군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화재를 끄는 소방관으로서 역할하였으며, 그 와중에 ‘교향곡 7번’을 창작한다. 이 작품은 전쟁을 테마로 하고 있는데 ‘레닌그라드 교향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만연의 쇼스타코비치는 1960년대 이후 당성과 경향성으로 어려운 창작시기를 경험하였으나, 그 끈을 놓지 않고 ‘교향곡 12번’, ‘13번’, ‘14번’을 연이어 발표하였으며, 유고 작으로 알려진 교향곡 15번을 마지막으로 창작의 길을 마감하였다.

 

 

 


왈츠 2번의 진실을 밝히다_ 글린카 음악 박물관
구름이 한 층 낮아지더니 하늘이 코에 닿을 정도로 지붕 가까이 다가왔다. 여전히 도시 천장에는 고드름을 따는 인부들이 바삐 삽을 놀리며 행인들의 보행을 위협하는 겨울의 파편들을 깎아 내리고 있으며, 도로에 녹아붙은 눈이 만들어낸 빙판길을 미끄러지듯 지나치는 사람들의 굳은 표정과 냉기로 인해 상기된 붉은 뺨, 그리고 짧고 희뿌연 호흡은 마음을 더욱 움츠리게 만든다. 심지어 모스크바를 관통하는 모스크바 강조차 늦깎이 겨울의 칼바람 앞에 굽이치는 물살의 위용을 드러낼 생각을 않으니 모스크비치에게 4월은 봄이지만 봄이 아닌, 그저 아련한 꿈이런가.
절반의 음악가들이 성장해나가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키워나갔다면 절반의 음악가는 타고난 천부성으로 어려서부터 오로지 음악에만 매진하였다 하자. 그렇게 가정하자면, 쇼스타코비치는 당연 후자에 속한다. 그런 그가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장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왈츠이다. 탁월한 서정성과 러시아적 향취를 품은 ‘왈츠 2번’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왈츠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종 영화와 연극에 배경 음악으로 장식되며 더욱 유명해진 이곡은 실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가진다. 내용인 즉, 바로 지금까지도 이 곡의 명칭에 관한 진실을 아는 이가 러시아 내에도 드물다 하니 진정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재즈 모음곡 2번’에 실린 왈츠 곡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은 러시아적 정서를 한껏 담고 있으면서도 전 세계 누구에게라도 너무나 친숙하고 은은하게 다가온다. 이 곡은 1938년 소비에트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되었다고 알려져 왔는데, 최근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며 애호가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왈츠 2번’의 제목은 '왈츠2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2번은 총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3악장인 ‘스케레초’가 우리가 아는 왈츠와 혼돈되었던 것이다. 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는 이 곡의 제목이 왈츠 2번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곡의 정확한 실제 명칭은 영화 <첫 번째 에셸론>을 위한 음악이며, 영화 음악으로 실린 왈츠 곡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곡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진 내용이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출연했던 할리우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과 영화배우 이병헌이 출연한 국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 수록되며 더욱 유명해진 '왈츠 2번'은 이처럼 실제로도 영화를 위해 창작된 곡이다. 1955년에 제작된 영화 <첫 번째 에셸론>은 소비에트 연극계의 거장이자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상임연출가였던 올레그 예프레모프가 배우로서 최초로 출연했던 영화로서 청춘 남녀들의 노동전선 투입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요 모티프로 하고 있다. 청년들이 군용열차를 타고 노동 현장으로 나가며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를 위해 쇼스타코비치는 감독 미하일 칼라토조프의 요청을 받아 직접작곡한 것이다. 따라서 1938년에 창작되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님이 자연스레입증된 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정적인 멜로디로 가득 차 있는 멜로드라마인 이 영화는 특히 끝나기 20분 전 피날레를 알리며 울리는 왈츠가 극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고 가는데, 바로 이 역할을 세기의 명곡, 즉 우리의 착각 속의 ‘왈츠 2번’이 행했던 것이다


5 쇼스타코비치 사진과 교향곡 콘서트 포스터

6 쇼스타코비치 자필 악보
 
7 집무실 의자와 책상

소비에트 영화음악의 대부_ 쇼스타코비치 아카예프
15편에 달하는 교향곡과 오페레타, 발레곡, 그리고 갖가지 비(非)클래식 곡을 작곡한 쇼스타코비치에게 있어 ‘왈츠 2번’이 영화를 위해 쓰인 배경음악이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는 서른 편이 넘는 영화 음악에 직접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쇼스타코비치 아카이브와 그가 살던 아파트를 찾아가 보았다. 높은 음 자리표 모양의 간판이 붙은 모스크바 시내 어느 거리 한 모퉁이를 돌아 전 러시아 작곡가 협회를 지나치자 작곡가가 생의마지막을 보낸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곳 7층에 그가 살았던 것이다. 한층에 마주한 아파트 2채를 점유하고 있는 이곳은 한 쪽은 쇼스타코비치 문서 보관소로, 나머지 한쪽은 당대 작가가 살았던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낡은 시멘트 계단을 거쳐 2명의 장정이 타면 꽉차버릴 듯 좁은 승강기가 웅웅이는 굉음을 내며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간다. 마치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를 낯선 과거로 이동시켜주는 타임머신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바로 이곳이 쇼스타코비치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라고 생각하니 감격이 벅차올랐다. 소비에트 시절 많은 예술가들이 망명을 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어갔던 반면, 쇼스타코비치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조국에 남아있었다. 그런 그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그의 노작들과 대면한다는 것은 충분히 영광스런 일이었다.

문서 보관소의 사서인 올가 블라디미로브나는 왈츠의 창작 배경뿐만 아니라, 그가 참여했던 영화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영화음악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브이 바빌론>(새로운 바빌론), <졸로토이 고리>(황금산), <류보피 네나비스찌>(증오와 사랑), 피라고프, <리어왕> 등에서 그는 음악감독을 맡았으며, 이 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햄릿>이라 하였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작곡가란 이면에 보다 삶에 근접한 대중음악가로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다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 그는 혼신을 다해 다양한 음악장르에서 활동하였으며 충분히 우리와 가까운 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명작이란 어느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변함없이 우리의 가슴 속에 녹아있는 것이듯 그의 왈츠는 새 봄의 향취와 함께 늘 그랬듯 우리곁에 변함없이 남으리라.

 

출처: 문화 저널 <우먼라이프>201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