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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러시아 바흐루쉰 연극 박물관


 

연극 속으로의 시간 여행

러시아 연극예술의 보고, 바흐루쉰 연극 박물관


글·박정곤


  오늘날 공상과학물에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로서 타임머신이 종종 등장한다. 이는 시간여행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과 과거를 되돌리고자하는 간절한 바람 속에서 생성된 인간 희망의 메타포라 할 수 있다. 현실과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는, 더러는 미래를 조망하기도 더러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지향점을 제시하는 시간 속으로의 여행. 이러한 상상 속에서 우리는 실현 가능유무를 넘어 크고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연극계에도 이러한 타임머신이 있다면? 여기에서 필자는 연극 박물관에 연극계의 타임머신이란 고유한 의미를 붙이고자 한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 초 인류적 판타지의 세계가 열리는 박물들의 왕국, 러시아에서는 바로 바흐루쉰 연극 박물관(театральный музей имени А. А. Бахрушина)이 그들의 왕국으로 자리하고 있다. 살아있는 연극의 파편들로 가득 찬 바흐루쉰 박물관. 이곳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러시아 극장들의 사관(史官), 바흐루쉰 연극 박물관

  공연 예술에 관련된 자료실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박물관 형식으로 자리하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모스크바가 진정 연극의 도시임을 입증하는 몇 가지 증거를 먼저 살펴보자. 우선, 러시아의 심장부인 크레믈린 옆에는 볼쇼이 극장과 말리 극장이 있다. 그들 극장 주변에는 크고 작은 군소 연극전용 극장들이 즐비하여 있다. 비단 이들 수만으로 증거를 내세우자는 것은 아니다. 이와 별개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개개 극장의 나름의 역사를 담은 연극 박물관 또한 곳곳에 즐비하다는 것이다. 실례로,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마야코프스키 극장에는 별관 형식의 극장 박물관이 있으며, 모스크바 시내 중심에 자리한 연극협회 도서관에는 100여년이 넘는 연극예술 관련 고문서들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 더욱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극장과 박물관은 살아있는 관객과 방문자들로 언제나 활기를 띠고 있다. 그 가운데에 바흐루쉰 연극 박물관은 군소 극장들의 모태와도 같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각각의 시대마다의 연극 문화와 환경, 차별되는 무대상황, 금방이라도 한 편의 연극이 펼쳐질 듯한 생동감 넘치는 진경을 한 몸에 담고 있다. 

  당대 바흐루쉰 박물관의 출현은 하나의 독특한 문화적 현상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서유럽의 연극문화가 러시아에 수용 된지는 이미 오래전이지만, 예술적 도구들을 수집하여 공연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당시로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문학, 예술, 과학의 비호자로서 활동하였던 모스크바의 산업자본가인 알렉세이 바흐루쉰(Алексей Бахрушин, 1865-1929)은 1890년대 중반 자신의 개인 소장품들로 박물관의 토대를 세웠다. 최초 박물관 건물은 1896년 건축가 기피우스에 의해 초기 영국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비대칭적 구조와 사각의 경사진 지붕양식, 그리고 끝이 뾰족한 창문들은 독특한 박물관의 성격을 건물 자체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박물관에는 유명 배우들의 의상, 에스키스, 포스터, 소품들을 비롯하여 무려 150만점 이상의 전시물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특히 소장된 연극예술 관련서적들은 러시아 내에서 유일무이한 진귀한 자료들이라고 한다.

  국고로 운영되는 바흐루쉰 연극 박물관에는 여러 연극학자들과 배우들, 의상·무대 감독들이 각종 행사를 통해 참여하고 있으며, 특히 프로젝트 형식으로 열리는 전시회에는 단순한 전시 이상으로 학술대회 및 토론회 등을 개최하기도 한다. 체호프와 오스트로프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극작가들, 그리고 대중 속으로 스며든 유명 연출가들의 숨결을 접할 수 있는 총체적인 장이 형성되는 이 곳, 바흐루쉰 박물관을 방문하는 이들의 표정은 늘 유쾌하다.


바흐루쉰 프로젝트 <러시아 연극의 황금기>

  2007년 바흐루쉰 연극 박물관의 가장 큰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 연극의 황금기>라는 전시회이다. 2006-2007년 러시아 연극시즌의 개막과 함께 열린 이 전시회는 짧은 기간의 전시에 그치는 단기적 행사가 아니라, 2008년 9월까지 장장 2년에 걸쳐 계속 될 긴 노정을 예정하고 있다. 특히 회고적 성격의 전시 프로젝트로서 <러시아 연극의 황금기>는 여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명으로 창설된 전문 연극극장들의 창립 250주년을 기리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아울러, 문화적 척도의 시기로서 19세기와 20세기 초 러시아 연극학파의 가장 두드러졌던 발전 과정을 1200여점의 전시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전시회와 관련하여 박물관 관장인 보리스 류비모프는 "본 전시회를 통해 러시아 최초 전문 연극극장으로서 알렉산드린스키 극장과 말리 극장의 창립 250주년을 독립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 서구주의자 게르첸이 쉐프킨과 모찰로프를 염두에 두고, 전 유럽에 그들과 동등한 예술가들은 없다고 말했듯, 이 양대 예술가들과 함께한 이른바 러시아 연극의 '황금기'를 생생히 조명하고자한다. 이를 통해 '황금기'는 1930년대, 즉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사망과 메이에르홀드의 비극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943년 네미로비치-단첸코가 삶을 마친 시기까지 길게 연장 된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전후 러시아의 연극 풍토에 대해 이미 다른 시대의 연극이라 전언하며, 황금기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실제 이 전시회는 세 개의 독립된 전시실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발레와 오페라를 위한 장소이며 다른 하나는 19세기 드라마 예술을 위한 공간, 마지막 전시실은 20세기 드라마 예술의 공간이다. 특히 19세기 드라마 전시실에는 당시 무대에 올려졌던 소품들과 의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마치 시간을 거슬러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시대별로 구분하여 현장감을 최대한 살린 전시실에는 전문 큐레이터들이 항상 위치하고 있으며, 별도의 정보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언제나 상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전시회의 일환으로 1824년부터 1941년까지의 러시아 연극사에 관한 연대기를 자체적으로 편찬해 전문 연극 연구자들에게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곁에는 전시회와 별도로 당대 최고의 가수라 불리어졌던 예술가 F. 샬라핀의 창작적 생애에 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그의 마린스키 극장과 제국 극장에서의 활동, 외국 순회공연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창설자인 바흐루쉰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기록을 비롯해, 당시 그가 박물관에 쏟았던 열정의 흔적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열린 공간으로서의 바흐루쉰 박물관

  앞서 언급했듯, 비단 러시아만의 고유한 소유물로서 연극 박물관이 존립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연극예술에 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 이곳 바흐루쉰 박물관만은 아닐 것이다. 그 목적에 따라 학술적 연구를 위한 장소인가 혹은 역사적 체현의 장인가, 자료 수집을 위한 장소인가 등으로 자료실의 성격은 나뉘어 질 것이다. 더욱이, '박물관'이라는 성격상, 바흐루쉰 박물관이 가지는 의미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정체된 혹은 고정된 시간만을 단편적으로 제시하는 장소로 인식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연극 박물관은 하나의 박제화 된 구시대의 유물이라기보다는 과거를 돌이켜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지향점을 찾을 수 있는 창조적 공간이지 않을까? 또한 자료의 수집과 정보전달이라는 거시적인 목적 이외에 당시의 현장에 대한 간접적 체험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바흐루쉰 박물관이 우리시대의 타임머신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현재 바흐루쉰 박물관은 연극 현장에 대한 체험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극사에 대한 강의와 유명 배우들과의 만남, 창작의 밤 등을 개최해 어린이와 성인을 막론하고 연극에 관심이 있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고 있다. 또한 대중에게 잘 알려진 S. 푸쉬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의 고서본과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의 초연 당시 포스터 등도 함께 전시하면서 초보 연극 애호가들에 대한 연극적 관심을 한 층 높여준다. 이렇듯, 펼쳐진 공간으로서 바흐루쉰 박물관은 화장기 없이 오래된 먼지 속에 감춰진 연극이란 비밀을 찾아오는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출처: 2007년 월간 <미르>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