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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초원의 전사들 - 칼미키야 공화국


유럽 대륙의 몽골리언

러시아 <칼미키야 공화국>

초원에 푸근한 바람이 분다. 지평선까지 뻗은 누런 황금 들녘은 사각이던 소리를 쉬이 죽이며 기름진 흑토에 서서히 눕는가 싶더니, 바람이 잦아지자 금세 다시 머리를 꼿꼿이 세우며 카랑카랑 살아있음을 알린다. 유럽 속 아시아, 아니 아시아의 변방을 지키는 수호자라 해야 더 걸맞을 칼미크(Kalmik)인들이 사는 곳, 칼미키야(Kalmikiya) 공화국. 이곳은 한 나라 안에서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 될 만큼 장대한 러시아 대륙의 유럽지대에 엄연히 위치하고 있지만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몽골 대초원을 연상케 한다.

일찍이 칼미키야는 칭기즈칸이 유럽대륙을 정복하며 천하통일을 노릴 때 이미 몽골리언에게 예고되었던 땅이었으며, 그의 일족들이 카스피 해로 이동하여 건설한, 그야 말로 기마족의 위상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오랜 세월 속에 칼미크인들은 러시아 인들과 융화되어 슬라브적인 색채도 다소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유목민의 정신은 아직까지도 잘 전승되고 있었다. 초원의 아들 칼미크인들이 유럽대륙에 뿌리내려 아시아의 맹주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칼미키야 공화국을 찾아가 본다.


기마족의 용맹이 살아 숨 쉬다 - 칼미크(Kalmik)족

칼미크인들이 이곳에 살 게 된 것은 벌써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칼미크'라는 말은 초기 이슬람과 고대 러시아 어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오늘날 이 말은 17세기 경 볼가(Volga)강 하류에 터를 닦은 오이라트(Oirat)족에 한정적으로 쓰인다. 오이라트는 서(西)몽골 지역에 자리하였던 몽골리언의 한 족속으로서 카스피해 인근에 사는 지금의 칼미크인들에게 선조로 인식되고 있다. 비단 몽골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에 걸쳐 널리 분포하였던 오이라트족은 인종학적으로 엘류트(Elut)족, 칼막(Kalmak)족, 중가리(Jungaria)족의 시조이며, 러시아에서는 칼미키야, 중국에서는 신장 위구르와 친하이, 몽골에서는 서(西)아이마키에 그 근원을 둔다.

오이라트라는 말 자체는 몽골어로서 '연합', '연대', 혹은 '가까운 지인', 혹은 '이웃에 사는, 멀지 않은 사람'란 의미를 가진다고 하며, 단어 오이라트가 '오이'와 '아라트'로 나뉘어져 숲의 사람이란 뜻을 가진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실제 현대에 와서 '오인 아르드'는 숲의 민족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니, 어떤 의미에서든 여러 사람의 협업을 중시했던 유목민들의 문화적 색채가 느껴진다 하겠다. 또한 토테미즘적인 성격에서 보았을 때, 오이라트는 '늑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핀란드어에서 유래한 ‘코이라’(늑대)와도 우연치 않은 동일성을 가진다. 이로 보았을 때, 서몽골 원시 조상들이 서방계통인 핀-우구르족과 접촉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바, 중세 8세기부터 이들의 역사는 눈에 띄게 되었는데, 최초에는 칭기즈 칸에 대항하던 오이라트인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오다 이후에는 거대한 몽골 제국에 흡수되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한다. 16-17세기 몽골제국이 멸망한 후 오이라트는 '데르벤 오이라트'를 건설한다. 그러나 16세기 말 17세기에 걸쳐 중가리아에 살던 오이라트는 분할되는데, 한 부분은 쿠쿠노르 호수 방향으로 유목을 하였고, 남아있던 대부분은 중가리아 한을 건국하였으며, 나머지는 러시아 영토로 들어와 칼미크 한을 건설한 후 피터 대제가 통치하던 본국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오이라트족은 지상에 약 63만 가량이 살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중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몽골과 러시아, 키르기즈, 미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칼미키야 공화국은 바로 러시아로 이주해온 오이라트의 한 분파가 개척한 땅이라 할 수 있다.


유럽대륙의 최대 불교사원, 후룰

전통적으로 인적이 드문 스텝을 찾아드는 이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었으니, 그 하나는 새로운 만남과 소식을 전하고자 찾아온 귀중한 손님일 테고 다른 하나는 침략과 약탈을 목적으로 한 도당(盜黨)일 터. 그러기에 멀리서 자신들의 문화를 접하고자 손님으로 찾아 온 필자를 칼미크인들은 기꺼이 정성스레 맞이하여 주었다. 필자가 처음 방문한 곳은 칼미키야 공화국의 수도 엘리스타(Elista)였다. 이곳은 전체 인구가 고작 십만에 불과한 자그마한 도시였는데 '모래 위에 세운 도시'라는 그 뜻처럼 황량한 초원 위에 아담하게 서 있었다. 그럼에도 현대식 건물 사이에 세워진 기와 건물들은 러시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이국적이겠으나 필자에겐 더없이 반갑게 다가 왔다. 실제로 기존의 러시아 도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동양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가령 붉은 기둥과 검은 기와는 중국의 고성들을 연상케 하였으며, 처마끝 장식은 우리의 편경과 유사해 우아미를 돋보이게 하였다. 더욱이 외국인인 필자를 바라보는 엘리스타 시민들의 표정마저 너무나 무던하였기에 마치 우리와 인접한 어느 아시아 나라에 와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칼미키야에서는 첫 만남부터가 대단히 인상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이들은 대문 밖으로 무언가를 손수 들고 나와 찾아든 객들을 환대하였다. 양손 맞잡고 조심스레 들고 나온 사발에는 독특한 빛깔의 음료가 들려 있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소금과 녹차를 넣고 말이나 소의 젖과 함께 끓여 만든 수테차(Suutei tsai)였다. 초원에 살던 유목민들은 이 수테차를 마시며 건조한 기후를 극복하였으며 인체에 필요한 비타민과 영양을 보충하였다 한다.

이와 동시에 차를 건넨 주인장 옆에 서 있던 다른 노부 한 분은 마치 주문과도 흡사한 노래를 부르며 목에 흰 목도리를 걸어 주었다. 칼미크어로 '하닥'(Khadak)이라 불리는 이것은 '흰 길'이라 해석되는데 평온한 인생과 행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처음 만난 귀인들에게만 전한다는 이 귀중한 두 가지 선물을 모두 얻었으니 필자도 이곳에선 제대로 귀인대접을 받았다 하겠다.

이들과의 만남 이후 필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절이라는 '황금사원'을 찾아갔다. 엘리스타 시내 어디에서나 보일만큼 웅장한 규모를 가진 황금사원은 '후룰'(칼미크인들의 불교사원을 부르는 명칭)이라 불렸다. 삼층 건물이지만 일반 건물로 따지자면 거의 10층 높이에 달하는 석조건물이었기에, 이곳에서 뿜어 나오는 웅장함과 엄숙한 사원의 분위기는 찾아드는 이들을 정갈하고도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우리불교와는 다른 라마불교가 정식 국교인 터라 스님들은 장삼과 회색 승복대신 황금빛 도포를 두르고 있었다. 불당에 들어와 기도하는 이들도 오체를 바닥에 대는 독특한 형식으로 기도를 올렸다. 또한 엄숙한 불당의 분위기 탓에 짧은 바지나 치마를 입은 여인들은 모두다 사원에서 제공하는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리고 들어와서는 조용히 기도를 마치고 신속히 돌아갔다.

러시아에서 불교가 최초로 수용된 것도 칼미크인에 의해서라는 설이 있을 만큼 이들의 불교에 대한 애착은 강하였다. 실례로 1690년 티베트로부터 한이란 칭호를 받은 칼미크의 왕 아유카 한도 불교를 숭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티베트 불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실례로 칼미키야에 있는 각각의 사원들의 이름을 달라이 라마가 직접 부여하였다고 하니 역사적으로 칼미키야 불교는 티베트와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였을 듯하다.

물론 지난 세기의 풍파를 겪어 온 다른 지역들처럼 이곳의 불교 역사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비에트 시대에 이곳은 스탈린의 압제 속 종교탄압을 받아 대부분의 사원들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기존의 승려들은 자리를 지키지 못해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망명을 가기도 하였으며 나머지 본토에 남아있던 승려들은 일반인으로 위장해 가정에서 몰래 제례를 올리거나 아니면 유형지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쳤기에 칼미키야 불교를 대표하는 황금 사원은 더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에 이르러 재건된 이곳은 유럽불교의 본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티베트와도 여전히 면밀한 교류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불교를 향한 칼미크인들의 애정은 서양인들의 땅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정신적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몽골리언의 대를 잇다 - 칼미키야의 아이들

유럽과 카프카스의 침략으로 국경을 지키기 힘들었던 러시아에게 칼미크 족은 변방을 수호하는 파수꾼으로서 큰 힘이 되었다. 공화국의 중앙 박물관에는 러시아의 피터 대제와 칼미크인들의 수장 아유카 한(Auka Khan)의 만남을 묘사한 그림이 있었는데,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색해 보이는 서로의 표정 속에는 엄숙함 보다는 호기심으로 가득했으며 커다란 괘를 놓고 가로 선 양국의 수장들은 민족과 국가의 병합이라는 대의 앞에 굳은 결의로 가득 차 있는 듯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만남은 다른 문화와 전통, 종교를 가진 이들이 만나 평화롭게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나간 훌륭한 실례를 보였기에 전쟁과 피로 가득한 남러시아의 개척사에 귀감을 남기고 있다.

이제 그들의 만남 이후 벌써 400여 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곳엔 새로운 세대가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칼미키야의 전통문화를 공부하고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역시 사방에 산이라곤 어느 한 곳 찾을 수 없는 광활한 대초원에서 말을 달리며 뛰놀고 있었다. 칼미키야의 어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잊지 않고자 전통학교를 세워 이곳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민족적 전통을 익힐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아동들은 조상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기마족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기마술까지 학교에서 배운다고 하였다.

특히 이들이 부르는 전통 음악은 ‘흘샤왓’이라 불리는 몽골 혹은 투바 공화국의 후미(khoomei)와 유사한 ‘목 노래’였다. 이 창법은 성대와 혀를 이용해 비성과 두성, 후성을 모두 내기에 일반적인 인간의 음색과는 전혀 다른 색의 노래를 쏟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 내용은 우리네와 다를 바 없었다. 손님을 맞이한 첫 번째 노래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어머니의 노래'였으니 말이다. 구슬프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한 멜로디는 금세 친근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칼미크어 노래가사를 해석해서 듣고 나니 그 내용 또한 우리네 사모곡이랑 너무나도 유사해 더더욱 가까이 와 닿았다. 동양적인 사상이다 하기 전 어머니를 향한 인간의 사랑이 어디나 다를까하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초등과정에서 중, 고등과정을 한 학교에서 수학한 후, 전문 예술가로 성장하는 학생들은 전공에 따라 악기를 연주하거나 민속무용과 가창을 익혀나간다. 이를 통해 해외에서 공연할 기회도 부여되는데 학생들에게 이보다 큰 영광은 없다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선후배 간에 유대관계가 우리의 어느 학교와도 비교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졸업한지 벌써 20년이 넘는 선배들은 아직까지 후배들을 위해 학교를 매일같이 방문하여 춤과 노래 지도에 보탬을 주고 있었다. 심지어 가정 내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를 거쳐 자식 대대로 ‘흘샤왓’을 이어오는 경우도 허다하다니 이들의 전통을 향한 사랑은 실로 대단하다 하겠다. 또한 전통교육은 러시아적 토양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승화되기에 커다란 긍지를 가진다고 하였다. 우리의 민족교육도 이제는 신구세대가 다양한 부분에서 함께 즐기며 보다 더 적극적으로 어우러져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성찰해 본다. 이들 아이들이 있기에 초원의 제왕 칼미크인들은 대초원의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으며,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얼굴을 통해 삶의 터전인 초원과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카스피 초원을 누비며 불멸의 신화로 오래오래 남을 수 있도록 기원하며 모스크바로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