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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예술과 문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러시아, 명작을 말하다

음악가 표트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대망의 2013년이 밝았다. 총선과 대선 열기가 한창이었던 국내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도자 선발과 런던 올림픽으로 지구촌 곳곳이 뜨거웠던 지난 2012년은 이제 지혜를 상징하는 뱀의 해에 그 자리를 내주었고, 세계 멸망을 예언했던 마야의 달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 속에 조용히 묻힌 채 한때의 재미로 기억남을 것이다.

1월 첫째 주 전체가 국정 공휴일인 예술의 나라 러시아에서는 지금 신년을 축하하기 위한 음악회와 발레를 비롯한 문화 공연이 여기저기 한창이다. 길고도 새하얀 건반, 그들 사이사이 수놓인 칠흑의 건반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 피아니스트의 터치가 어느 때보다 더욱 힘차 보이는 신년 음악회는 청중들의 마음을 정초부터 풍성하게 해준다.

그 가운데 유독 러시아 국민들의 귀를 매혹하는 곡이 있었으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비창>이 그 주인공이다. 가장 러시아적인 작곡가이면서도 동시에 비운의 음악가라 평가받는 표트르 차이코프스키(Pyotr Thaikovsky)는 당대 러시아 국민파, 낭만파 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19세기가 낳은 천재 작곡가라 하겠다. 특히 그의 <비창>은 새해맞이로 한껏 들뜬 러시아인들의 가슴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찬찬히 새해설계를 할 수 있도록 조력해준다. 하여 필자는 계사(癸巳)년의 희망찬 시작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세계를 빌어 보다 차분히 열어보고자 한다.

 

 

비운의 음악가? 법률학도에서 출발한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의 웅장한 협주곡을 듣노라면 마치 코린트식의 화려한 석주기둥이 가득 솟은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궁전에 와있는 느낌이 한번쯤 들 법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차이코프스키는 휘황찬란한 궁전과는 동떨어진 시베리아 우랄 산맥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1840425, 지금의 차이코프스키시()인 보트킨스크(Votkinsk)의 한 대가족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성장한 그는 광산학자인 아버지와 프랑스계 어머니 아래 형제들과 화목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음악을 사랑했었는데 특히 어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해 주기도 하였다 한다. 실례로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집 한 구석에는 기계식 오르간이 놓여 있어서 언제라도 음악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다 한다. 이런 가정환경 덕분일까, 그의 음악적 재능은 일찍이 발휘된다. 1945년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시작한지 고작 3년 뒤엔 가르치던 교사보다 악보를 더 잘 볼 정도로 탁월한 감각을 보였다.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언어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어 외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곧잘 구사하였는데, 8세가 되던 해에는 심지어 프랑스어로 시를 쓰기도 하였다하니 여느 천재들처럼 다재다능함을 타고났다 하겠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늘 행복만이 그를 따랐던 것은 아니다. 동전에 전면과 배면이 있듯, 비극의 시작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유독 그를 사랑하였던 과외교사가 결혼을 이유로 떠나간 이후 그는 한참동안 정신적 공허함을 달래지 못하였다. 여기에 그칠세라 차이코프스키는 학업을 명목으로 어머니의 손길마저 제 나이에 이르게 떨쳐내야만 했다. 1850년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 가족은 차이코프스키를 법률학교에 보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의 권유로 인해 법률학교에 입학한 그는 12세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게 되었는데, 학교에서마저 그는 짝사랑하던 동급생으로부터 냉랭한 대우를 받는다.

그렇게 사랑하던 주변 여성들로부터 상처 받은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이는 다름 아닌 남동생 모데스트였다. 지극히 섬세하고 내성적이었던 차이코프스키에게 만남과 이별, 사랑의 상처는 실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이러한 심경의 아픔은 그를 위로해주었던 남동생을 향한 낯선 사랑으로 점차 변이되어 갔다. 그런 연유에서 아직까지도 모데스트와 차이코프스키의 관계를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로 보는 견해들이 많다.

이런 과정 속에 차이코프스키는 1859년 법학 대학교를 마치게 되며, 이후 법무부에서 관리로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의 유일한 취미는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홀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법무부에서의 안정적인 일상도 삶의 밑바탕에 깔린 음악에 대한 열정을 식게 할 수는 없었으니, 얼마 후 그는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기 위해 니콜라이 자렘바(N. Yaremba)와 안톤 루빈슈타인(A. Rubinstein)이 이끄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다. 그때부터 그의 뛰어난 악성(樂性)은 빛을 발하게 된다.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졸업 즈음부터 실러의 송시로 칸타타를 작곡하고 오페라 <보예보다>의 서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백조의 호수>(1877)<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호두까기 인형>(1892)과 같은 주옥같은 발레곡과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들, 그리고 불후의 명교향곡들로 이어지는 그의 창작 노정에 서막이 올라간 것이다.

 

 

클린시의 차이코프스키 저택을 가다

1월의 눈 덮인 하루. 일요일 아침의 클린(Klin)시는 그 어느 때 보다 맑고 고요하였다. 시내를 향하던 크고 작은 차들은 바쁜 걸음을 멈추고 휴일의 망중한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도로 가득 눈이 쌓이도록 내버려뒀으며, 자갈돌이 빼곡히 박힌 보행자 전용 거리엔 인적조차 드물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시골도시 클린의 구()시가지 한편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기념박물관은 신년맞이를 위해 군데군데 가득 쌓인 눈들을 치우느라 다른 곳과 달리 분주했고, 정원 한 켠을 덮은 얼음 아래 숨겨진 푸른 싹의 청초함은 다가올 봄을 기다림에 잠시 긴 잠에 빠진 듯하였다.

차이코프스키가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이미 작곡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을 무렵이다. 18925월에 클린으로 옮겨온 차이코프스키는 생의 마지막 1년 반을 이곳에서 보내며 창작의 열기를 태워 올렸다. 오페라 <이올란타>와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비롯하여 피아노를 위한 18개의 작품과 사중주 <>, 그 외의 수많은 로망스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차이코프스키의 저택은 2층으로 된 목조 가옥이었다. 저택 자체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소박한 면모를 보였는데, 이 건물조차도 작곡가는 일부만 사용하였다 한다. 차이코프스키는 2층에서만 창작활동을 하였기에 1층과 저택의 대부분은 집을 돌보는 하인인 사프로노프가 관리했다 한다. 차이코프스키에게 가족과도 같았던 그는 20년이 넘게 작곡가와 함께 거처를 옮겨 다니며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본다. 창작실이 있는 2층의 구조도 비교적 단조로웠다. 침실 하나에 응접실, 그리고 서재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함께 살던 조카 다비도프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기에 그에게는 피아노가 놓인 응접실이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박물관 내부에는 아직까지도 차이코프스키가 생전 남겨놓은 유품들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곡가가 죽자마자 동생 모데스트와 조카 다비도프는 바로 이곳을 기념관으로 만들어 유품 보존에 힘썼기 때문이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많은 문서들이 독일군에 의해 강탈당했지만 아직도 많은 소장품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를 받으며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이 유명해진 계기는 찾아든 유명 음악가들로 인해서이기도 하다. 피아노 분야에서는 내놓으라는 대가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밤에 열리는 정기 음악 모임에서 직접 그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영광이었다 한다. 가령,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알렉산드르 골덴바이저(A. Goldenweiser)와 하인리히 네이가우스(H. Neuhaus)도 이곳을 찾았으며,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S. Richter)와 에밀 길렐스(E. Gilels)도 차이코프스키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 이곳을 방문해 연주회를 가졌다 한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아든 수많은 대가들마저 쉽사리 헌사하지 못했던 곡이 있었으니, 바로 교향곡 6<비창>이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비창>

한없이 섬세한 피아노곡과 가슴 속 심장이 터질 듯 웅장한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가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은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과 감정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그 가운데 사람의 인생을 마치 한편의 일대기처럼 그려낸 <비창> 교향곡은 때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화두를 제시하기도 한다.

<비창>교향곡은 18932월 말부터 8월까지 클린의 영지에서 최종적으로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에 작품의 제목을 차이코프스키는 <인생>이라 명명하려 하였으나, 동생 모데스트의 권유로 <비창>으로 붙이게 되었으며, 완성된 작품은 조카인 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바쳐졌다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비창>은 작곡가가 생애 최대의 걸작이라 스스로 일컬었을 만큼 명작 중에 명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생의 마지막 작품을 직접 지휘한 후 일주일이 지난 뒤 차이코프스키는 유명을 달리했다. 인간의 꺼져가는 심장 박동을 연상케 하는 마지막 악장으로 인해 <비창>은 차이코프스키의 죽음 뒤에 수많은 의문을 남겼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모순적이고 심오한 테마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이 많으나,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셔 콜레라로 숨졌다고 하니 인생의 무상함이 더욱 <비창>에 스며드는 듯하다.

실제로 <비창>이 가지는 삶의 테마에 관심을 보였던 사촌 안나 메르클링에게 차이코프스키는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네 말이 맞구나. 첫 번째 악장은 유년기, 즉 음악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의미하는 거지. 둘째 악장은 젊음과 상류 사회의 유희를, 그리고 셋째 악장은 삶의 투쟁과 영광의 업적들이야. 그리고 마지막 장은 당연히 죽음에 대한 기도와도 같지. 그러나 아직 나와는 거리가 멀구나. 아직 나는 창작을 위해 많은 힘을 남겨놓았단다. 더 훌륭한 작품들을 창작할게다.”

작품에 대한 구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왔었다 전해지나 공교롭게도 작가의 죽음과 그 시기를 같이하여 많은 의문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비창>. 형식적인 면에서도 <비창>은 당대에 말 그대로 파격이었다 하는데, 다른 서구의 교향곡과 대별되는 음악적 양식의 독특함이 그 증거라 하겠다. 전통적인 교향곡 창작에 반하여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은 마치 진혼곡과도 같이 느리고 슬픈 음조로 4악장을 마무리한다. 라흐마니노프 재단의 스카프티모프스카야 교수는 전체 교향곡의 흐름을 차이코프스키 본인의 생애와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느리고 반복적인 선율과 모티프로 시작된 1악장은 2악장을 거치며 맹렬해졌다가 3악장에 가서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마치 그의 인생의 정점을 거치듯 3악장은 장엄하게 끝을 맺고 4악장은 듣는 이로 하여금 실로 묘한 감정을 가지게 만든다. 3악장이 유독 강하고 긴 이 교향곡은 4악장에서 거의 모든 에너지를 담아내는 다른 교향곡과는 달리 생명의 소멸을 암시하는 느낌으로 악장을 마무리한다. 마치 인간의 심장박동을 의미하는 듯 타악기의 음색은 차분히 울리는가 싶더니 점점 그 속도가 느려지다 악장이 끝남과 동시에 멎는다. 마치 차이코프스키의 생명이 다한 것처럼 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남긴 차이코프스키의 흔적

새벽의 긴 적막은 기적과 함께 사라지고 기차는 어느덧 페테르부르크 중앙역인 모스크바 역에 도착했다. 러시아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해당 역은 종착지역의 지명을 이름으로 한다. 하기에 모스크바에는 페테르부르크의 옛 지명인 레닌그라드 역이, 페테르부르크에는 모스크바 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필자는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 역 인근에 위치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의 묘지를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문인들과 음악가들, 그리고 과학자들이 안장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묘소는 문학의 아버지 도스토예프스키와 음악가 무소르스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그것이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묘비는 두 천사가 그를 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무덤들과 달리 비석 위에는 꽃다발이 가득하였다. 눈을 잔뜩 머금은 세찬바람이 살을 에는 날씨에도 차이코프스키를 향한 러시아인들의 애정이 끊이지 않았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관리인의 말을 빌자면, 이 꽃들은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고 발길을 잇는 방문객들로 1년 내내 시들 날이 없다 하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해되었다.

수도원의 담장을 따라 거닐다 어느덧 갠 날씨에 차이코프스키가 죽기 직전까지 머물렀던 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던 남동생 모데스트가 마련한 이 아파트에도 그를 기념하기 위한 장식물들이 역시나 가득 남아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차이코프스키가 나와 창가 소복 쌓인 눈 위로 반짝이는 햇살 아래 향기 그윽한 차를 마시며 오선지 노트에 음표를 채워 넣을 것만 같았다.

페테르부르크의 고로호바야 거리 한 모퉁이에 위치한 이곳 차이코프스키의 아파트는 베나’(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의미)라는 문인들이 자주 왕림하였던 카페가 있어 유명한 곳이다. 그 역사가 길다보니, 20세기 초에는 먀야코프스키(V. Mayakovsky)와 블록(A. Vlok)과 같은 러시아 상징주의, 미래주의 작가들이 다녀갔었고, 호텔로 개조한 객실에는 방문한 작가들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의 명패가 각각 붙어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했던가. 카페 오른쪽 건너편에는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자신과 죽음의 결투를 벌였던 육군 장교 단테스와 처음 만난 장소가 있었고, 왼쪽 사거리 건너편에는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에 등장하였던 타티아나가 살았던 곳이 자리하였다. 이처럼 일상 속에 문학과 역사,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을 대면할 수 있는 페테르부르크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더 없이 큰 음악적 영감을 가져다 준 마음의 고향이었으리라.

그가 남긴 <비창>처럼 죽음의 순간까지 생을 노래한 차이코프스키의 예술혼은 오늘날까지 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아낌없이 명작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