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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코미 보르쿠타

코미의 별, 보르쿠타를 가다

러시아 코미 공화국 보르쿠타 시() 답사기

 

 

일 년의 절반이 정적으로 얼어붙은 겨울이기에 그들에게 있어 봄이란 그저 새삼스럽기만 하다. 그 겨울마저 소복이 쌓인 눈과 저만치 멀리서 따사로이 빛나는 등불을 연상케 하는 추억서리고 낭만적인 계절이 아닌, 그야말로 우리네가 상상할 수 없는 서늘하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백토(白土)로 뒤덮인 시간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니 초록 들길에서 상춘을 즐긴다는 것은 지극히 낯선 일탈일 뿐, 녹아내린 눈물이 방울방울 모여 샛강을 만들어 저만치 먼 북극해로 이별을 고할 때까지 봄이란 그저 자유롭지 못한 계절일 뿐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과연 어떤 이들의 삶에 대해 이토록 비정하게 설을 풀고 있는 걸까? 그렇다. 아직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한 그들, 바로 북극을 끼고 살아가는 북방 유목민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툰드라의 봄은 눈 층이 얕아지고 점도가 떨어져 한길 비렁 아래로 나락치는 썰매와 목 끝까지 숨이 차 걸음걸음에 힘겨워하는 순록들로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이다.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마치 천형과도 같은 계절이리니.

이제까지 조우하였던 대게의 유목민들은 년 중 봄을 가장 위험한 계절이라 서슴없이 말하였는데, 까닭이 있어 이들은 봄의 유목을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푸른 눈동자의 유목민이라 불리는 북방 코미 족은 문명과의 접촉에 익숙해진 탓에 봄의 거친 환경을 때로는 기술적으로 때로는 전통적 수단을 통해 보다 세련되고 슬기롭게 극복해 나간다. 자유로이 도심과 왕래하면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삶에 따라 유목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코미 유목민. 그런 이들에게 코미 북방의 끝 보르쿠타(Vorkuta)는 문명과 전통, 그리고 이색적인 과거사를 가진 모태(母胎) 도시로 각인되고 있다.

러시아인을 제외한 외부인들에게는 아직도 이색적이기만 한 보르쿠타 시()지만 다가올 미래에는 여러 부분에서 우리에게 친숙해 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미리 독자들에게 알림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잔인한 역사의 시작 - 스탈린 시절의 보르쿠타

일찍이 북방에는 이방인이란 존재치 않았다. 오로지 유목민과 극지방 짐승들만이 공평히 영토를 나누어 서로의 영역을 침범치 않으며 조화롭게 살아갔다. 북극해 인근의 네네츠가 그러할 테고, 타이가를 치고 올라온 코미가 그러했을 테다. 대게 모험과 탐험을 떠나는 이들은 무언가 새로운 세상과 대면하였을 때 느껴지는 신선함을 끝없이 쫓아갈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란 탐험가가 바라던 오지의 투박함을 이내 조화로움 혹은 혼란으로 바꾸어 버리니.

태초부터 야생의 흔적을 가득 담고 있던 보르쿠타 마을은 소비에트 시절 군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방인과 접촉하며 어느새 문명화된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가 만들어진 배경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문명의 침습만이 이곳을 거쳐 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러시아 연방 코미 공화국의 북쪽 끝 도시 보르쿠타는 한 때 유형지였다는 유쾌하지 못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살을 에도록 잔인하리만치 혹독한 환경의 집단 수용소가 들어서며 전 러시아에 악명을 날리게 된 것이다. 가령, 1936년 이곳에 마을이 설립되며 외부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는데, 역시나 마을의 개발은 굴라그라 불리는 유형지와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되며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강제 유형을 왔다. 굴라그에는 정치범과 강력범들이 주로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철로 건설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아 강제노역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실례로, 마을에 위치한 굴라그인 '보르쿠굴라그'에는 전 세계 22개국에서 136개 민족이 이곳으로 끌려와 유형생활을 하였으며 스탈린의 철혈정책 탓에 범죄자들은 심지어 걸어서 이곳까지 와 강제노역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41년에 다다라 러시아 북방 최초의 철도가 끝내 이들의 손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이후 남자들은 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하는 노역에 다시 투입되었다 한다.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추위와 질병으로 죽어나갔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곳으로 보내져 스탈린 사후까지 복권되지 못하고 객사한 이들도 많았다 한다. 또한 전범자와 강력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유형자의 대부분이었겠으나 억울한 누명 혹은 숙청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니 그 피해의 실상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점은 한인들 또한 이 먼 북녘의 끝 보르쿠타까지 보내져 강제수용 당하였다 하니 참상의 실체는 상상 그 이상이다. 국내에는 아직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곳 보르쿠타에는 191명의 한인들이 강제수용 당하여 죽음에 이를 때까지 처참한 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일본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쓰고 이곳으로 쫓겨 와 참담한 생을 살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거나 현장에서 뼈를 묻거나 하였다 한다. 실례로 대구 출신의 오상손, 서울 출신의 대학생 신분이었던 이은호, 정확한 출신지가 기록되지 않은 강기수, 그리고 출신지가 평천이라 기록된 정학순 분이 1940년대 초반에 이곳에서 유형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보다 자세한 조사를 통해 반드시 진상을 밝혀야할 우리의 과제이다.

 

 

 

당시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아보고자 보르쿠타를 두르고 있는 환상도로를 따라 차를 달려 보았다. 사방은 얼어붙은 유리거울처럼 새파랗게 서슬이 돋아있었고 하늘은 잔뜩 찌푸려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불어 닥칠 기세였다. 이길 마저 수용된 여인들이 장비 하나 없이 직접 손으로 건설하였다 하니 새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길을 따라 툰드라를 옆에 끼고 반시간 가량 달리다보니 가득 눈 덮인 묘지가 눈에 들어 왔다. 여기저기 빼죽이 솟아있는 십자가로 인해 묘지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당시 유형살이를 했던 이들의 묘들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이들에 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기에, 심지어 가족들마저 그 행방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유형을 살던 전범자 혹은 정치범들이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면서 이들의 실체는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독일과 에스토니아, 일본, 중국, CIS 독립 국가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자국민의 넋을 달래기 위해 기념비와 십자가를 직접 이곳으로 공수해왔다 한다.

그럼에도 세월의 무상함이란 끝이 없나니. 과거의 아픔을 감추려는 듯 혹은 잊으려는 듯 보르쿠타는 피로 얼룩진 과거를 흐르는 시간 속에 오늘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북방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다

보르쿠타는 원래 보르쿠타 강에서 그 지명이 유래되었다. '보루쿠토이'라는 네네츠어에서 유래한 강의 이름은 그들의 언어로 '곰이 많은 곳'을 뜻한다. 실제 보르쿠타 강변에는 늘 곰들이 무리지어 물고기를 사냥하곤 하여서 유목민들은 순록에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예의주시하여야 했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곳에서 곰과 대면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특수차량을 타고 한참을 툰드라로 들어가야만 곰을 마주할 수 있다 하니 문명의 개입이란 이처럼 무서운 모양이다. 반면 유목민들은 곰의 공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으니 그들의 생업은 오히려 안정화를 갖게 된 셈이다.

인구 7만의 자그만 시골 도시로 코미 공화국의 행정구역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보르쿠타는 루드니크라는 옛 지명을 가지고 있다. 1943년 공식적으로 도시로 승격되며 굴라그와 탄광개발 등으로 인구가 25만까지 급증하다 이제는 다시 초라한 시골마을의 모습으로 돌아 온 보르쿠타지만 석유, 가스와 같은 천연자원 개발과 함께 관광산업을 활성화시켜 재기의 도약을 하며 새로운 도시의 얼굴을 가꾸어 가고 있다.

보르쿠타 일대의 자연 경관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동쪽으로는 숲과 초지로 경계를 이룬 야생의 툰드라가 펼쳐져 있으며, 서로는 더없이 신비로운 극지방 우랄이 뻗어 있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각종 희귀 동식물도 보르쿠타 인근에 자생하는데, 가령 북극토끼와 북극 여우, 멸종위기의 북극 늑대, 야생 순록, 그리고 북극 인삼이라 불리는 로디올라가 이곳의 주종을 이룬다. 오늘날 보르쿠타는 스키를 즐기는 애호가들에게 숨은 명소로 알려지고 있으며, 극지방 우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양한 루트의 자연 캠핑장을 만들고 또 대규모 스키장을 위한 시설 기반을 2015년까지 완비할 계획이라 하니 장래를 기대해 볼만 하다.

보르쿠타를 떠나 툰드라로 들어가기 위해 인접 마을로 이동하였다. 보르가쇼르라 불리는 이곳은 소비에트 시절 코미 공화국에서 가장 큰 시골 마을이었다. 보르가쇼르는 '순록이 많은 곳'으로 해석되는데 마을 중심에 가득 자리한 아파트들이 과거 번성하였던 이곳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늘날 이곳은 급격한 인구 감소와 이주로 인해 마을 곳곳에 인적이 사라진 폐가와 폐허로 변한 건물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필자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던 것은 텅 빈 마을이 아니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었다. 갈라진 얼음 틈으로 그 맑은 흐름을 보인 강물은 깊은 골짜기 아래에서 굽이치고 있었으며 설경 속에 울타리를 친 진초록의 숲은 강한 콘트라스트를 자아냈다. 이따금 머리 위를 비행하던 붉은 눈의 뇌조 떼는 자연과 동화를 이룬 유목민들의 기상을 대신하는 듯하였고, 멀리서 들려오는 뇌조의 외마디 울부짖음은 마을의 고요를 깨뜨리는 유일한 악()이었다.

언제 도래할지 기약 없는 여름이지만 때가 되면 이곳도 오색찬란한 들꽃들로 만발할 것이니 보르쿠타의 봄은 잔인하되 풍성함을 약속하는 준엄한 데미테르 여신과도 같더라.

 

 

빵과 차의 혁명 유목의 역사를 새로 쓰다

보르가쇼르를 거쳐 스노모빌을 타고 백여 킬로미터를 툰드라를 향해 들어가 보았다. 인근에 위치한 가장 가까운 유목민이 이곳에 있다하니 만나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법. 유목이란 보르쿠타를 대표하는 얼굴 가운데 하나이기에 더욱 이들을 만나봐야만 했다.

그럼에도 길이 없는 툰드라이기에 겹겹이 싸인 눈을 헤치고 스노모빌로 단숨에 접근해 들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수차례 눈길에 빠지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지나 온 길을 다시 돌아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조금씩 나아가다 어렵사리 유목민과 조우할 수 있었다. 환갑의 나이에 이른 어르신과 그의 조카 부부가 살고 있는 단출한 유목민 가정이었다. 이들 역시 북극해의 지류인 카라(Kara) 해까지 유목여정을 하는 유목민들이었는데 오랜만의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유목민의 식사 상에는 금방 삶은 순록 수육과 냉동 생선들, 그리고 러시아식의 검은 차와 흑빵을 비롯해 연유와 손수 만든 순록 소시지가 놓여 있었다. 양손을 써가며 맛있게 생선을 발라먹는 주인장께서는 두툼한 뱃살의 생선 한 덩이를 필자의 접시 앞에 올려놓아 주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선을 권하던 주인장의 표정에선 손님맞이에 인색하지 않던 우리네 시골 어르신들의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유목민에게 있어 빵과 차는 그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주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빵의 유입으로 인해 유목민의 삶은 구조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빵과 차는 이들에게 산업혁명이 현대문명에 가져다 준 그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커다란 문화 대변혁을 야기하였다. 가령, 현대 문명과의 접촉으로 인해 유목민들은 예전과 달리 전통 순록 가죽 대신 방수포로 춤을 세우기도 하며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던 순록 썰매 대신 스노모빌을 종종 타기도 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물질적 재료만 바뀌었을 뿐 생업의 형태 자체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태곳적 전통에 따라 여전히 이들은 춤에서 생활하고 순록을 타고 툰드라를 따라 사계절을 누빈다. 다시 말해 문명은 제한적 편리를 제공하였을 뿐 전통이란 기반 자체를 흔들어 놓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 문화는 어떨까? 일찍이 순수한 생고기와 순록의 피, 그리고 스트로가니노와 같은 냉동 생선, 그리고 야생 딸기만으로 식생을 이어가던 이들은 빵과 차를 접하며 주식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 아직도 당연히 생식과 생혈을 취하지만 화식이 가지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아졌으며 탄수화물이 가져다 준 중독성으로 이젠 빵이 없는 유목민의 식탁이란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인간의 미각이란 것이 애초부터 간사함을 띄었을 런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접한 빵의 구수함이란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매혹을 가진 듯하다. 아니, 이제는 굳이 멀리하지 않아도 될 문명의 이기이기에 빵은 곧 그들이 숭상하는 순록의 가치에 버금갈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빵과 차를 제외하고서는 예전과 다름이 크게 없다. 빵 마저 밀가루의 위력을 조금 빌린다는 것뿐이지 손수 장작불에 반죽을 구워 먹거나 야생차와 가공된 차를 섞여 먹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수천 년간 이어진 식생을 한순간에 바꾼 차와 빵 마저도 이들은 자신들의 삶에 조화를 이룬 새로운 문화로 가꾸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코미는 충분히 문명을 즐기며 스스로의 유목 생활을 영위한다. 이따금 시내의 페스트 푸드가 이들의 코와 혀를 자극하지만 여전히 이들에게는 천연에서 얻어진 음식들이 더 구미가 당긴다. 어렸을 적부터 익숙해진 자연의 맛 때문일까 혹은 문명에 대한 거부일까 많은 고민을 해 보지만 그 이유를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내일도 이들은 저 먼 유목 선상에서 순록의 고삐를 억세게 잡아당기며 북방 민족의 쾌활한 일상을 이어가리란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밤도 보르쿠타의 별은 아름답게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