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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자료/러시아 연극 자료

아르바트의 봄 - <모스크바 바흐탄고프 극장>

 

아르바트 거리에 봄의 활기가 가득하다. 4월의 춘설(春雪)은 봄의 여왕 앞에 그 자취를 감추었으며, 어느덧 따사로운 온기가 거리의 악사에게도, 화가들에게도, 상춘(賞春)을 즐기러 나온 모스크바 시민들에게도 흘러넘친다. 스탈린상 수상자 르이바코프(A.Rybakov)가 소비에트의 청춘들을 초상하며 거닐었던,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천재시인 푸쉬킨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500여년 역사의 가도(街道) 아르바트. 그 역사의 길을 따라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은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세기에 대한 연민을 시와 선율에 담아 낭랑히 읊조렸던 음유시인 아쿠자바가 그토록 찬미했던 이곳은 오늘날 인간의 언어가 범접하기 힘든 '봄'이라는 자연 언어에 예술혼을 담아 찾아오는 객들을 반기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는 러시아의 민족적 정서가 담겨있는 공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의 퍼포먼스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길의 시작에서부터 종착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모여든 관객들과 그들을 위해 마련된 크고 작은 공연들로 아르바트의 진경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하겠다. 바이올린을 들고 혈혈단신 독주 삼매경에 빠진 악사들, 몸짓 언어로 지나가던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마임 예술가들. 이렇듯 아르바트 거리는 일 년 내내 장르를 불문한 예술인들과 관객으로 분주하다.

그 가운데, 특히 저녁 7시 경부터 아르바트를 지나는 행인들을 사로잡는 극장이 있었으니, 연출가 예브게니 바흐탄고프의 이름을 딴 국립 아카데미 극장(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театр имени E.Вахтангова, 이하 바흐탄고프 극장)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계 록 가수 빅토르 최를 추모하기 위한 골목과 노상 화랑(畵廊)촌을 사이에 두고 극장 건물은 위치하고 있는데, 무슨 연유에선지 삼삼오오 모인 젊은이들이 극장의 현관을 둘러싸기라도 하듯 이곳을 떠나지 않고 맴돈다. 낮에는 빅토르 최의 노래를 부르며 봄으로 가득찬 시대의 자유를 발산하는 젊은이들이 극장 앞을 매우며, 저녁에는 체호프와 셰익스피어의 향연이 극장 내부를 잠식한다. 회색빛 웅장한 석주가 유독 눈에 띄는 바흐탄고프 극장은 가히 러시아의 문화중심이라 할 수 있는 아르바트를 지키는 ‘파수꾼’과도 같다 하겠다. 아르바트 지킴이 바흐탄고프 극장, 그 봄의 축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예술극장(MXT) 스튜디오에서 바흐탄고프 극장으로

극장의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짧지 않은 극장사에는 연출가 바흐탄고프의 인생노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바흐탄고프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러시아 연출가들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봐야 할 것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바, 가장 상위 단계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가 응당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 뒤를 이어 아방가르드 미학의 대표자인 메이예르홀드와 '배우 연기술'의 달인 미하일 체호프와 같은 이들이 등장하리라. 이러한 거장들의 유기적인 사슬 속에 하나의 이음새로 역할 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예브게니 바흐탄고프(E.Vakhtangov)이다.

1883년 러시아 남부 블라디카프카즈에서 태어난 바흐탄고프는 담배공장을 경영하던 부유하면서도 건실한 부모 아래에서 성장했다. 1903년 모스크바 대학교 자연과학부에 입학했던 청년 과학도가 연극에 심취하게 된 동기는 다름 아닌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시스템'의 영향이라는 것. 아마추어 연극인으로 활동하던 바흐탄고프에게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거대한 산이자 이상과도 같았을 것이다. 연극을 향한 열정은 결국 그를 1909년 아다셰프 연극 학교에 입학하도록 만들었으며,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절대 빠트릴 수 없는 배우이자 연출가로 성장하도록 이끌어갔다. 그 결과 미할일 체호프가 배우로서 몸담았던 모스크바 예술극장 제1스튜디오의 디렉터를 역임하게 되기도 하였다.

바흐탄고프 극장은 1913년 설립된 바흐탄고프의 스튜디오에 토대를 둔다. 1917년 혁명 전까지 이곳은 거리의 이름을 따 만수르스키 스튜디오, 혹은 학생 드라마 스튜디오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까지 3년에 걸쳐 유지되어 오던 드라마 스튜디오는 이후 모스크바 예술극장 제3스튜디오로 변경되었으며, 1926년부터는 현재의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아카데미’란 칭호를 부여받은 것은 1956년의 일.

세대를 막론하고 바흐탄고프 극장이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가져다주었던 작품은 단연 <투란도트 공주>이다. K.고치의 <투란도트 공주>는 극장의 고유한 예술 미학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22년 바흐탄고프가 직접 연출한 이후, 1960년대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였던 R.시모노프가 두 번째 판본을 선보였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 G.체르냐호프스키가 세 번째이자 동시에 마지막이 된 판본을 선보였다. 당대에는 어느 한 편도 흥행에 실패하지 않았으며, 동일한 작품을 두고 다르게 선보인 각각의 연출가들의 상연을 두고 많은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비록 초연 후 3개월 만에 바흐탄고프는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최초의 맹아로서 역할을 한 바흐탄고프의 연출작이 관객들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실례로 바흐탄고프의 연출작을 두고 스승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예술 극장이 문을 연 이후 23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토록 감흥을 준 작품은 많지 않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와 바흐탄고프 극장은 남다른 두각을 보였다. 1932년 바흐탄고프의 제자인 B.자하바가 연출한 고리키의 <예고르 불르이초프와 다른 이들>은 소비에트 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1936년 또 다른 제자인 R.시모노프가 베네딕트역을 연기한 셰익스피어의 <헛소동>도 그에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극장은 전쟁 기간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전장에 나가있는 군인들을 위문하는데 할여하였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A.코르네이추크의 <전선>, K.시모노프의 <러시아인들>, E.로스탄의 <시라노 데 베르제라크>와 같은 작품들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직접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러시아 사실주의 심리주의 연극의 출발선에서부터 ‘대(大)조국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2차 세계대전의 전선 한켠에 이르기까지 바흐탄고프 극장은 러시아의 근대 역사와 함께하며 늘 대중들 편에 서 있었으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세계 속 러시아연극, 러시아 속 세계연극'이라는 새로운 기치로 문화 글로벌리즘의 중심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연출가 리마스 투미나스

소비에트가 붕괴된 지 약 스무 해가 되어가는 지금, 러시아의 예술은 안팎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더러는 상업적인 욕심에 ‘예술적 완성물’이 비즈니스 도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으나, 어느 극단을 막론하고 예술적 '천성'을 잃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특히 요즈음에는 구(舊) 소비에트 출신의 연출가들이 두각을 보이면서 변화와 개혁의 움직임이 커져가고 있다. 1990년대부터 이미 최고의 연출가 반열에 들어선 므튜즈(MTUZ) 극장의 카마 긴카스를 비롯하여, 타바코프 사단의 리투아니아 출신 연출가 민다우가스 카르바우스키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이들은 각종 연극 축제에서 수상하며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이들 가운데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현재 바흐탄고프 극장의 대표 연출가로 활동 중인 리마스 투미나스(Rimas Tuminas)다. 극장의 예술 감독이기도 한 투미나스는 1952년 리투아니아 켈메 시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로 이동한 후 연극예술계의 명문학교인 기치스(러시아 연극예술 아카데미-역자 주)를 졸업한다. 불가리아 극작가인 I.라디츠코프의 작품인 <1월>을 최초로 상연하면서 연출로서 입문한 그는 리투아니아 드라마 아카데미 극장에서 연출활동을 하며 국내외에 알려졌으며, 핀란드와 스페인 등지에서 체호프의 <바냐 외삼촌>, 몰리에르의 <돈 주앙>을 상연하였다. 1990년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리뉴스에서 말리 극장을 설립하여 활동하던 기간에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아진 바, 국제 발틱 연극 축제와 체호프 연극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으며 연출가로서 공신력을 쌓아갔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성공적인 상연을 선보였던 레르몬토프 원작의 <가장 무도회>는 제 3회 체호프 축제에서 '미학적 풍경의 완전무결'이라 평가받았으며, 1998년 황금 마스크 축제에서 '최우수 외국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리마스 투니마스의 수작으로 손꼽힌다.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연출가 투니마스는 모스크바 '소브레멘니크'극장에 초청을 받아 F. 쉴러의 작품을 상연하였으며, 2002년에 바흐탄고프 극장으로 와서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을 상연하였다. 당시 비평가들은 '연극시즌 중 상연된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작이자 논쟁적인 작품'이라 평가하였다. 서두르지도 분잡하지도 않게, 끈임 없이 연출가 투니마스는 고골의 선문집적 등장인물들을 첨예화하며 조율하였다. 선대의 메이예르홀드와 에프로스의 실험들이 고골의 산문작품들을 성공적으로 무대로 옮겨왔다면, 투니마스의 <검찰관>은 그들의 맥락을 유감없이 계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바흐탄고프 극장의 예술 감독으로 재임하며 투니마스는 금번 시즌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로 새로운 도약을 내딛었다.

    

<투란도트 공주>에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로!

오늘날 아르바트에 위치한 극장 건물은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이전에 이곳에는 B.베르그라는 개인에 소속된 독립가옥이 자리하였는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자리하다 전쟁 당시 폭탄이 떨어져 건물의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이후 재건축을 통해 오늘날의 건물이 완성되었는데, 현재 이곳에서 상연되는 작품으로는 체호프의 <갈매기>, 몰리에르의 <암피트리온>, 푸쉬킨의 <스페이드의 여왕>, 이삭 두나예프스키의 <흰 아카시아>,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등이 있다.

물론, 바흐탄고프 극장을 떠올릴 때 누구에게나 우선하는 공연이 바로 <투란도트 공주>일 것이다. 그만큼 <투란도트 공주>는 극장의 역사와 명성과 같이 하여 왔다. 비록 오늘날 바흐탄고프 극장의 무대에서는 이 작품을 찾아볼 수 없으나 언제라도 준비가 되는 날이 오면 상연할 것이라는 굳은 다짐을 바흐탄고프 극단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이 작품의 뒤를 잇고자 여러 작품들과 연출가들이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 대표작으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를 뽑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트로이의 왕자인 트로일러스와 그의 아내 크레시다를 둘러싼 사랑과 배신, 양측 군대의 명예와 신의의 문제에 슈제트를 두고 있는 작품으로 흔히 셰익스피어의 어두운 희극(dark comedy) 장르에 포함시킨다.

투니마스가 직접 연출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에는 방탕과 약탈이 가득한 준엄하고도 그로테스크한 세계가 제시된다. 작품의 두 주인공은 이러한 세계가 표출하는 광기의 희생양으로 묘사된다. 다른 어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트로이 전쟁은 물질세계의 파괴와 기아, 질병을 야기하는 무서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을 통해 양심의 몰락과 연민의 부재, 가치척도의 소멸과 같은 ‘인간 영혼의 왜곡’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 투미나스는 핵심을 두고 작품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처럼 피어오르는 봄의 역동 속에 바흐탄고프 극장은 한 치의 주절임 없이 관객 속 무대를 만들어 나간다. 뜨거운 여름의 뙤약이 오기 전 싱그러운 봄바람 아래 셰익스피어와 조우해 보는 것도 꽤나 유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