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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자료/러시아 연극 자료

모스크바 유고 자파트 극장


 

변방에서 중심으로 - <유고 자파드 극장>


글 및 사진 제공·박정곤


백야의 시작을 알리는 6월은 러시아인들에게 꿈과 같은 계절이다. 자정너머까지 지지 않는 해로 인해 더러는 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쾌청한 날씨 아래 산책을 즐기기도 또 가족들과 인근 숲을 찾아 바비큐 파티를 열수도 있기 때문에 진정 놓치기 아까운 계절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아이들과 함께 예술가들의 생가 박물관을 직접 방문해 보기도 하거나 화려한 야외 공연을 감상하는 등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에 6월은 더욱 뜻 깊은 계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스크바는 굳이 시내 중심가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도시 여기저기에 숨겨진 볼거리와 이색 박물관, 극장들이 즐비해 있으니 이 보다 훌륭한 문화유산을 가진 도시도 전체 유럽에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가운데 모스크바의 외곽에서 이름난 문화의 명소를 한 군데 뽑자면, 어렵지 않게 <유고 자파드 극장>(Театр на юго-западе)을 거명할 수 있다.

러시아어로 '남서쪽'(south-west)을 지칭하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유고 자파트 극장은 <우 니키트스키 보로트 극장>과 <올레그 타바코프 스튜디오> 등 쟁쟁한 연극전용 소극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상연하면서 더욱 큰 관심을 얻고 있다. 작가의 150주년을 기념하며 거행되고 있는 <갈매기>에서부터 장장 18년에 걸쳐 매진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이르기까지 유고 자파드 극장은 화려한 레퍼토리로 전 모스크바를 사로잡고 있는데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잠시 살펴보자.   


변방에서 중심으로 우뚝 서다 - 유고 자파드 극장

먼저 유고 자파드 극장의 원류를 찾아 올라가보자. 1974년 소비에트 후기로 접어든 모스크바의 어느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메셰르스키> 클럽에서는 니콜라이 고골의 <결혼 피로연>이 상연되었는데, 바로 이 작품에 극장장 발레리 로마노비치 벨랴코비치(Valery R. Belyakovich)의 형제인 세르게이 벨랴코비치와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때 극장의 최고 배우였던 빅토르 아빌로프가 참여하였다. 그래서 세간의 사람들은 이 작품을 유고 자파드 극장의 최초의 작품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유고 자파드 극장이 만들어 진 것은 1977년의 일이다. 여느 극장과 다름없이 이곳 또한 아마추어 극장 스튜디오 형식으로 창설되었는데 설립의 근저에는 젊은 일꾼들과 노동자, 그리고 모스크바 변방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배우이자 연출가인 벨랴코비치는 노동청년 애호가 극단과 학생 청년 애호 연극단을 연합하여 연극 스튜디오를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유고 자파드 극장의 전신이 되었다.

그들은 무대를 비롯하여 극장 내부에 100여 석의 객석을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제작하여 설치하였으며 수도의 중심에서 거리가 먼 베르나드스코보 거리의 끝자락에 극장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개관 초부터 관객에게 흥미를 주는 여러 레퍼토리 작업을 활기차게 진행해 나갔으며 이는 순식간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

1970년대, 80년대 연극 스튜디오 운동의 최고의 리더로서 통했던 유고 자파드 극장은 어느덧 수도 모스크바의 문화 콘텐츠의 상징이 되었다. 실례로, 1985년 극장은 민중극장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1986년 극장은 모스크바 콤소몰 시상식에서 수상을 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극장은 비단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연극 페스티벌에 참가해 나갔으며, 소비에트에서는 이례적으로 제프 바로의 <아메리칸 연극 페스티벌89>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87년 이르러서 극장은 여러 연극적 실험 단체 가운데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러한 활동의 결과 1991년에는 러시아 문화 위원회를 통해 국립 극장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창조적인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예술 감독이자 상임 연출가 자리는 극단 창립에서 오늘날까지 러시아 연방 민중 예술가인 발레리 벨야코비치가 직접 맡아오고 있으며, 실험적인 레퍼토리로 끊임없이 발전해 나온 바, 현재에는 총 20여명의 스태프와 35명가량의 배우가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들 가운데 9명은 러시아 연방 공훈 배우의 직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6월의 레퍼토리를 살펴보자면, 러시아 풍자 희곡의 거장 니콜라이 고골(N. Gogol)의 <결혼 피로연>, <검찰관>, 세익스피어(W. Shakespeare)의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 밤의 꿈>, <맥베드>, 안톤 체호프(A. Chekhov)의 <갈매기>, 미하일 불가코프(M. bulgakov)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니콜라이 에르드만(N. Erdman)의 <자살> 등 러시아 고전과 서양 고전, 러시아 현대극이 골고루 섞여 있다. 여기에 브람 스토커(B. Stocker)의 <드라큘라>를 각색하여 올리는 등 실로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레퍼토리 속에서 유고 자파드 극장은 배우들의 외적인 역동성을 힘 있게 실어 보이는가 하면 내면에 잠재된 인간의식을 치열하게 파헤쳐 보이기도 한다.


러시아 연극계의 검투사 - 예술 감독 발레리 벨랴코비치

오랜 기간 동안 전문 연극배우로 명성을 떨쳤던 러시아의 민중 예술가 발레리 벨랴코비치는 유고 자파드 극장의 창립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설립 당시만 하더라도 모스크바라기보다는 거의 변두리라는 이미지를 떨치지 못했던 남쪽 끝에 극장을 세운 그는 오로지 연극을 향한 열정 하나만으로 다부지게 관객들을 이끌기 시작하였는데, 이처럼 관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실제로, 아침저녁을 막론하고 젊은 배우들의 연습은 그칠 줄 몰랐으며, 연출가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무대에서의 실험 작업을 밤을 새며 행하였다. 여기에 연습을 마친 배우들은 극장 여기저기를 직접 수리하며 하루의 시작과 끝을 극장과 함께하였다. 이러한 배우들의 노력 끝에 드디어 장장 300-400회에 달하는 공연 횟수를 자랑하는 대작들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개인사를 살펴보자면, 1977년 모스크바의 남서쪽에 극장을 연 그는 국립 연극 예술원(GITIS)에서 연출학을 수학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민중 예술가인 보리스 라벤스키가 그의 지도 교수였는데, 그는 남다른 열정으로 예술원에서의 수학을 마치고 1981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 그는 극장의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며 후학들을 위한 교수 활동도 겸하였다. 가령, 포멘코와 제노바츠, 쿠드랴쇼프와 같은 교육자-연출가들도 그의 절친한 동료이며 그들의 배우들도 벨랴코비치 극단에 몸을 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 끝에 벨랴코비치는 수많은 훌륭한 대작들을 남겼는데, 비단 그의 능력은 연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특히 최근 상연되고 있는 <인형들>의 주인공을 비롯하여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는 볼란드 역을, 동일 작가의 <몰리에르>에서는 몰리에르 역을, <햄릿>에서는 햄릿 역을 맡는 등 배우와 연출가를 오가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슈바르차의 <용>(Dragon)과 블라디미르 소로킨의 <도스토예프스키 트립>(Dostoevsky-trip), 알베르 카뮤의 <칼리굴라>와 같은 작품들을 빠뜨릴 수 없으며 본인이 직접 쓴 연극 <모노> 또한 큰 인기를 모우고 있다.

이처럼 벨랴코비치는 수도 모스크바의 변방에서 특별한 사회문화 공간 가운데 한곳을 창조하였다. 그는 언제나 새롭다. 매우 빠른 시간에 그의 존재는 연극 공연계에 또 다른 현상으로서 유명해졌으며, 새로운 예술 원칙과 그들만의 독특한 무대양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의 무대에서는 언제라도 지루한 연극이 올라오는 경우는 없었으며,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은 상연되는 러시아의 고전, 즉 체호프와 고골, 고리키의 작품들에 일순간에 매료되었다. 1987년에 이르러서는 연극잡지 <연극 인생>이 주관하는 예술제에서 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해낸 후 벨랴코비치는 또 다른 연극적 실험을 시도, 급기야 <거장과 마르가리타>(1993), <밑바닥에서>(1996)를 만들어 냈다.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는 기존이 사회주의 사실주의 연극으로 성행하던 당대 스타일과 달리 등장인물들이 활동하는 무대 공간을 여러 개의 이층 침대로 배열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게 배치하였는데, 벨랴코비치의 뛰어난 연출 능력을 입증한 훌륭한 예라 하겠다.  

이와 함께, 연출가에게 개작은 또 다른 창작이라 하였던가. 벨랴코비치의 개작품 가운데 하신토 그라우(Jacinto Grau)의 작품 <세뇨르, 피그말리온>을 본인이 직접 각색한 <인형들>(Dolls)이라는 작품은 근간의 모스크바 연극계에서 크게 관심을 가지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장안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을 인형과 같이 물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질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개관적으로 보여주며 우리에게 색다른 느낌과 성찰을 가져다준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갈매기>에 이르기까지

극장의 대표적인 레퍼토리 가운데 희곡 <거장과 마르가리타>(Master and Margarita)는 거의 매회가 매진이라 수 주 전부터 예약을 하지 않으면 좌석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황리에 상연되고 있다. 1993년 5월 21일에 초연된 이후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상연되고 있는 이 작품은 장장 3시간 40분에 이르는 긴 상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객석 어느 곳에서 소곤거리는 소리 한 번 없이 끝까지 모두가 집중한다.

불가코프 원작의 장편 소설을 총 2막으로 각색하여 구성한 이 작품은 독특하면서도 일상적이지 않는 불가코프의 예술 세계를 무대 위에서 유감없이 펼쳐 보이는데, 바로 이 작은 무대 장막을 넘어 불가코프의 판타지가 쏟아져 나온다면 실로 믿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음악과 조명, 배우연기가 극치의 조화를 이루었을 때, 거장 불가코프는 유고 자파드 극장의 무대 위에서 다시금 살아났다. 등장인물만 하여도 주인공인 볼란드와 마르가리타, 여호수아, 마트베이, 본디오 빌라도, 거장을 비롯하여 장장 서른 명에 달한다. 이 많은 인물들이 관객과 가까이 대면한 소극장의 작은 무대를 활보하며 뿜어내는 위력이란 실로 가공할 만하다. 특히 거장이 시공간을 현란하게 오가며 등장인물들을 현혹하는 장면과 장엄하리만치 철학적인 여호수아와 빌라도의 대화 장면은 객석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현실과 꿈을 착각하리만치 빠져들게 만든다.      

이 작품과 함께 대중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갈매기>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체호프의 원작에 충실한 이 작품은 최초 다른 스타일과 형식으로 극장에서 상연되어 왔었다. 심지어 2003년에는 서울 국제 공연예술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아 국내 무대에서 상연된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상연되고 있는 작품은 2008년부터 재창조된 작품으로서 연출가가 심혈을 기울여 창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며 그 위에 자신의 고유한 색을 덧칠한, 이른바 무대 예술의 조화로운 형식을 제대로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푸른 달빛의 반주 아래 가득 찬 일상의 가벼움 속에서 진행되는 이 연극은 관계자의 말에 따르자면, 주인공 콘스탄틴 트레플레프와 니나 자레츠나야를 외계에서 온 이방인으로 금세 만들어 버린다. 주인공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는 것이며, 감정을 느낄 수도 없으며 그저 가장할 따름이다. 또한 4막에 등장하는 갈매기의 박제 대신 그들 상호간의 사랑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가벼운 바람만이 갈매기의 '비상의 박제'를 대변하며 무대 가득 크나큰 여운을 남긴다.  

장장 3시간 동안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덕성들, 즉 사랑과 용서, 화해, 그리고 실패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모든 부분을 무대에서 보여 주는데, 특히 여 주인공 니나 자레츠나야 역을 맡고 있는 카리나 드이몬트(Karina Dymont)는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호소력 짙은 음성으로 4막에 일어나는 콘스탄틴의 죽음을 앞두고 관객들의 서정적이고도 비극적인 감정을 극대화한다. 

이처럼 훈풍이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는 갈매기의 비상처럼 이곳 모스크바의 기나긴 6월의 백야는 유고 자파드 극장의 푸르른 열정으로 더욱 매혹적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