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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자료/러시아 연극 자료

모스크바 국립 렌콤 극장

러시아 연극계의 스타군단 - <모스크바 국립 렌콤 극장>

글․박정곤

바야흐로 꽃망울이 피어오르는 춘삼월(春三月)이 도래했다. 겨우내 잔뜩 움츠러들었던 대자연도 이제 동야(冬夜)의 묵은 때를 훌훌 털어내고 초록으로 넘실거리는 산과 들이 자아내는 춘향(春香)을 만끽하고자 그 준비가 한창이다. 풀내음 물씬 풍기는 우리네 ‘봄의 교향악’에 부러움을 느낄세라, 아직은 눈꽃이 만발한 러시아에서는 봄의 기색이 저만치 멀리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눈보라와 거리곳곳에 눌러 붙은 얼음들로 행보마저 쉽지 않은 터이니, 더러는 봄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이 거리를 맴돌 뿐이다. 그럼에도 ‘기다림의 미학’이 생활화된 러시아 인들에게 3월은 활력의 계절이라 하였던가. 단지 봄에 한걸음이나마 더 다가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은 기쁨으로 충만 되곤 한다. 또한 모스크바를 활기로 가득매울 ‘여성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에 거리 곳곳에는 벌써부터 설렘으로 가득하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여성 인권과 사회 참여도가 강한 러시아다보니 3월 8일, 바로 이 ‘여성의 날’은 연중 가장 큰 휴일 가운데 하루로 손꼽힌다. 이날만큼은 남자라면 주변 여성에게 적어도 꽃 한 송이 정도는 선사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저런 이유로 갖은 무시와 멸시를 받더라도 어느 한곳 하소연할 장소도 마땅치 못하리라.

이 즈음하여 뭇 여성들에게 공연 초대장을 선사하는 남성이라면 언제라도 환대를 받는 법. 러시아의 문화 중심지인 수도 모스크바답게 공연에 대한 애착도 우리의 상상이상이니 드라마 극장들이 즐비한 드미트로프카 거리는 이 기간이 되면 말끔히 몸단장을 끝낸 여성인파로 언제나 가득 메워진다. 특히 올해로써 창단 83주년을 맞이하는 <렌콤>극장(The national LENKOM Theater)에는 꽃다발을 안은 남녀 관객들로 유독 봄의 향이 가득하니,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증을 해소해보자.

 

거장들의 무도회-모스크바 국립 렌콤 극장

연극이란 고유한 예술 장르가 당대 부흥하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대중 관객들에게 예술 그 자체로 다가갈 수는 없는 걸까? 혹은 대중들의 예술적 취향에 거슬러 사장되는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걸까? 이는 철의 장막이 걷힌 지 스무 해가 넘어서는 러시아가 풀어야할 중차대한 예술적 과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성을 배제한 상연물이 허가되지 않던 소비에트 사회를 거쳐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지난 세기의 양단에서 러시아는 우리가 느껴보지 못한 혼란과 비극을 경험해야만 했다. 실례로, 21세기의 새로운 사회 구조 속에서도 여전히 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서구식 상업 연극에 심취해 러시아 고전의 정통성을 상실한 연출가들도 있다.

그 가운데 이념이란 갈등을 예술 속에서 보다 쉽게 풀어내고 있는 렌콤 극장이 있으니, 이 극장의 역사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혹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보다 쉽게 해결할 해법이 떠오를지도 모르리라.

1907년 건축가 이바노프 쉬츠에 의해 건설된 이 모던(modern) 양식의 건물에는 혁명전 까지만 해도 상인들의 클럽이 자리했다. 이곳에서는 종종 음악극과 드라마, 보컬이 섞인 막간극들이 상연되었으며 저명한 문화예술 활동가들과 귀족들의 왕래도 잦았다. 혁명 이후 이곳에는 정치단체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집’이 자리하였으나 공산당에 의해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1년 후인 1918년에는 건물의 연단 위에 스베르들로프 명칭 ‘공산당 대학교’가 세워졌다. 실례로 이곳에서는 1920년에 제3차 소비에트 공산 청년당 대회가 열렸는데 당의 수장 블라디미르 레닌이 직접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한 바처럼, 올해로 창단 83주년을 맞이하는 렌콤 극장의 최초 설립 기원은 <트람>(TRAM-청년 노동자 극장의 준말)에서 찾을 수 있다. <트람>극장은 1927년 모스크바 콤소몰의 주도하에 창설되었으며 창단 첫해부터 큰 이슈로 떠올랐다. 1923년부터 잠시나마 영화극장으로 쓰였던 건물은 무대 상연에 맡게 보수되었으며 음향과 조명 장치가 증설되어 공연을 위한 여건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정작 놀라웠던 것은 증축된 건물이 아니라 공연의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트람은 극장도 아니고 트람인들은 배우가 아니라 흥분되어있는 강연자이자 선동가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이곳의 젊은 작가들은 현대의 기선으로부터 고전 연극의 경험을 내던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당대 극장의 문학 레퍼토리 분야를 맡고 있던 사람은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로 유명한 미하일 불가코프(M.Bulgakov)였으며 음악은 I.두나에프스키가, 춤은 N.글란이, 신체 역학은 메이에르홀드의 딸인 이리나 홀드가 가르쳤다. 배우 수업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N.바타로프와 N.흐멜레프 등이 맡았으며, 무대예술은 E.키브릭과 U.피메노프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년 후 트람의 무대에는 러시아와 소비에트 예술의 고전인 오스트로프스키와 고리키, 푸쉬킨의 작품 등이 상연되었다.

공산당의 주도하에 예술이 당의 선전 목적으로 전락하던 한때, 극장의 명칭은 <레닌스키 콤소몰>로 변경되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공산화와 당의 압제로 인해 러시아의 전통적인 순수예술이 거의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극장의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예술적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 예술 감독 M. 자하로프가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20세기 초에 모던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상인들의 악취미로 인해 지어졌다는 턱없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이 집은 굳건히 러시아의 공연예술을 지켜왔으며, 이제는 나의 삶의 일부이자 매혹의 대상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1938년 2월 20일 말라야 드미트로프카 거리에서 새로 문을 연 극장은 당시 얼마 전 해체된 모스크바 예술극장 2관에서 영입한 이반 베르세네프를 수장으로 내세웠다. 1930년대 러시아 공연예술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던 예술극장 연극학교의 배우들, 즉 S.기아친토바, S.비르만 등도 그와 함께 극장의 문을 두드렸다. 다시 말해, 베르세네프의 지도하에 극장은 새로운 숨결을 얻게 된 것이다. 그의 지도에 따라 극장은 일련의 훌륭한 무대예술을 익힐 수 있었으며, 강건한 예술 감독의 손길에 따라 극단은 더욱 단결력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신념에 가득 찼던 예술혼의 자유도 그리 길지는 않았으니, 베르세네프는 그의 재능과 정열이 한창 불타오르던 1951년에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 이후로 극장은 오랜 기간 동안 지도자가 없이 홀로 남겨졌다. 물론 그간 이런 저런 예술 감독들이 지나치기도 하였으나 특별히 인상 깊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 연출계의 거장 아나톨리 에프로스(A.Efros)가 예술 감독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20세기 러시아 연극의 산증인들-A.에프로스와 M.자하로프

오늘날 렌콤 극장이 스타 극단으로 발돋움하는데 있어 절대 지나쳐서는 안 될 두 인물이 있다. 바로 1960년대 극장을 이끌었던 A.에프로스와 현 예술 감독인 M.자하로프가 그 장본인이다. 이들을 간과하고서는 비단 렌콤의 역사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후기 연극연출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없다.

극장의 새로운 삶과 도약은 1963년 소비에트 명연출가 아나톨리 에프로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M.크네벨이라는 대가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중앙 아동 극장의 상임 연출가를 거쳐 레닌스키 콤소몰로 영입되었다. 예술에 대한 이데올로기 문제를 감시하는 감독관들에게 그의 창조적 도덕적 탐색들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연출가는 관객들에게 진정한 예술의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당에서 규정한 감독관들의 선전물조차 그는 관객들에게 읽어주지 않았다.

객석을 향한 연출가 에프로스의 외침은 연극을 통해 관객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삶의 의미를 고찰하게 하였다. 그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극장의 레퍼토리 하나하나를 수정하였으며 무엇보다 동시대와 절명의 조화를 이루도록 애썼다. 실례로, 빅토르 로조프의 <결혼식 당일>과 알렉세이 아르부조프의 <나의 가련한 마라트>, 에드바르드 라드진스키의 <사랑에 관한 104페이지>, 미하일 불가코프의 <몰리에르>, 그리고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 등이 주된 레퍼토리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탄생도 3년을 채 이어가지 못했다. 이유인 즉, 당의 명령에 따라 에프로스가 <말로이 블론로이> 극장으로 옮겨가야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극장은 너무나도 빨리 날개를 접어야만 했다. 실제로, 에프로스가 당의 요구에 따르지 않자 소비에트 문화부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해 상연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다. 혹은 허가가 된다고 할지라도 어려운 난관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무대에 선보일 수 있는 사정이었다. 특히 희곡 속에서 그가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평범한 인간의 개인성과 복잡 미묘한 심리, 다시 말해 성격이 강한 캐릭터 보다는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 혹은 일상에 지친 인간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검열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거장이 떠난 후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졌는데, 바로 그의 뒤를 이어 신예 연출가 M.자하로프가 등장한 것이다. 소비에트 민중 예술가이자 러시아 연방 예술대상 수상자인 자하로프 예술 감독은 1933년에 태어났다. 지금의 러시아 연극 예술원의 전신인 기티스(GITIS)에서 수학한 그는 1956년부터 페름 대학교와 모스크바 대학교 등의 학생 연극단체들과 함께 상연 작업을 하며 연출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와 그는 모스크바 사티라("Сатира"-풍자를 의미) 극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정식 연출가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67년 그가 상연한 A.오스트로프스키의 <수입이 좋은 장소>는 오늘날 대연출가로서 칭송받는 그를 세상에 알리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후 자하로프 감독은 극장을 옮겨 1973년부터 지금까지 렌콤 극장에서 연출가로 일하게 되었다. 자하로프가 예술 감독으로 추대되며 극장에는 또다시 많은 쇄신이 일어났으며, 특히 그의 지도하에 대외적인 극장의 명성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선대 연출가가 제시한 정통성이 보다 자연스레 대중들과 규합되도록 그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대중들 또한 새로운 형식 속에 살아 숨 쉬는 자하로프의 작품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자하로프 감독의 연출 작업들은 러시아 연출(演出)사에서도 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으며, 특히 <틸>과 <유나나와 아보스>, <갈매기>, <피가로의 결혼식> 등은 오늘날까지도 렌콤 극장의 레퍼토리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이 외에도 자하로프 감독은 영화와 비평에도 조회가 깊은 바, 수많은 소비에트 영화물을 남겼으며 현대 연출가들의 제 문제에 관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연출에 따라 극장에서는 여러 대스타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얼마 전 작고한 A.압둘로프와 O.얀코프스키는 러시아 최고 남자배우에 지명되기도 하였으며, 연출가의 딸이자 민중 예술가인 A.자하로바는 현재까지도 최상의 연기를 자랑하고 있다. 몇몇 배우들의 비보로 인한 공백이 작다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스타군단이라 불리는 렌콤 극장은 신예배우들과 그 전통을 이어가며 여전히 최고의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정통성과 대중성의 합(合)을 향한 진화

21세기가 문을 연지 10년이 지났다. 그간 러시아 공연계는 실로 다양한 실험과 새로운 시도를 행하며 고유한 연극예술을 정착시키고자 해답을 탐색해왔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으로 뻗어나가는 출구를 모색하기도 하였으며, 시베리아를 거쳐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통성에 기반을 둔 러시아 고전의 위상을 널리 떨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21세기의 지난 10년은 러시아 공연 역사에서 가히 기념비적인 시간이었다 할 수 있다.

‘예술이 진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인들은 대중과 호흡하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잃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하였기에 섣부른 판단으로 그들을 재단하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예술이 발전되어 왔다고는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정통성에 대한 고수가 자칫 박제화 되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예술은 이미 온기를 품지 못한 과거 속 유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정통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들 또한 빛이 바래지 않은 살아있는 예술이라면 언제든지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으리라. 이러한 의미에서 렌콤 극장이 보여주는 오늘날의 모습은 정통성과 대중성으로 양단되는 연극 풍토에 또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해준다 하겠다.

 


출처: 월간 <우먼 라이프> 2010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