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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예술과 문화

두 명의 빅토르

 

두 명의 빅토르 (The Two Viktors)

러시아의 두 영웅, 빅토르 최와 빅토르 안을 말하다

 

 

백야를 기다리며 부쩍 길어진 해는 6월의 페테르부르크를 더욱 빛나게 물들이고 있었고, 파릇한 잎사귀에는 사이사이마다 싱그러움이 넘쳐났다. 밤늦게까지 지칠 줄 모르던 어느 카페의 흥겨움은 네바 강변에 새벽이 도래해서야 고요를 찾았으며 문틈으로 새어나올 정도로 뜨겁던 열기는 늘어진 그림자 아래서 잠깐의 휴식을 맞이한다. 온 밤을 무대 위에서 신들린 듯 연주하며 노래하던 한 사람, 검은 머리칼에 검은 가죽점퍼를 걸친 동양인 얼굴의 키 큰 사내는 이곳저곳 얼룩진 스티커들로 도배된 낡은 기타를 말없이 내려놓고 자신의 노래에 갈채를 보내던 한 무리의 젊은 군속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 빅토르. 빅토르 최(Viktor Choi). 러시아 록(Rock)음악에 새로운 장을 열었던 신화의 주인공.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사반세기가 흘렀건만 그 목소리만은 변함없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으니, 그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럴 즈음, 당대 화려했던 전성기를 보낸 빅토르 최의 아성이 채 흐려지기도 전, 또 한명의 빅토르가 광활한 러시아 대륙을 정복하며 혜성처럼 등장했으니 바로 쇼트트랙의 빅토르 안, 안현수 선수이다. 지난 소치 올림픽을 통해 러시아 빙상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올림픽 기간 중 비단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선수였다. 특히나 스포츠 분야에 남다른 애정을 과시하는 러시아에서 그는 이제 단순한 스포츠 스타가 아닌 동계 종목의 정신적 지주로서 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며, 지금도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은 그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단숨에 이름을 외치며 환호를 보낼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하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러시아 최고의 록커(Rocker) 빅토르 최와 그의 숨결을 담아 <카레이스키의 전설>을 동토의 땅에서 이어가고 있는 안현수, 빅토르 안의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한다.

 

 

소비에트의 마지막 영웅, 빅토르 최

습하고도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득 머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을 정처 없이 거닐던 한 청년의 발걸음은 카페 <캄차트카> 앞에 멈춰 섰다. 늦은 시간까지 연기가 자욱한 카페 내부는 금단의 음악이었던 록을 갈구하는 젊은 피의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어느 때보다 달구어져 있었다. 가죽 기타 케이스에서 빅토르 최의 얼굴이 그려진 기타를 꺼내며 그가 연주한 첫 노래는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의 <마지막 영웅>이란 곡이었다.

빅토르 최. 한인 3세 러시아 록(Rock) 가수. 1982년에서 1989년까지 총 7년에 걸친 음악 활동 중에 100여곡 이상이 담긴 9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으며, 동시에 5장의 싱글을 추가로 발표했던 소비에트의 전설적인 록 그룹 <키노>(Kino)의 리더. 다하지 못한 그의 노래는 아직도 팬들의 심금을 울리며 남녀노소 및 연령을 초월하여 크게 사랑받고 있다.

1962621일 붉은 제국 소비에트의 수도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다. 아버지 로베르트 최가 구소련의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시에서 생활하다 거처를 옮긴 후 러시아 여인 발렌티나 구세바와 결혼하여 그들 사이에 독남인 빅토르 최가 난 것이다. 냉랭한 초원이자 스탭으로 둘러싸인 크질오르다에는 비단 로베르트 최의 가정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인 동포들이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이후 극동에 살던 대부분의 동포들은 본의에 상관없이 이역만리 동토의 땅으로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가령 강제이주를 당한 한인들은 이르쿠츠크를 거쳐 낯선 우즈베키스탄으로, 그리고 종착지인 카자흐스탄까지 고난의 역정을 걸어야했는데, 빅토르의 가정은 이주의 끝점까지 다다른 셈이다. 크질오르다 지역 외에도 카자흐스탄에는 강제이주를 당한 동포들이 탈디코르간, 우슈토베 등지에서 집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청산리 전투의 명장 홍범도 장군도 이곳 카자흐스탄에서 초라하게 말년을 보냈다 한다.

당시 러시아에 살던 수많은 이주민들은 현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편의상 이바노프(Ivanov)나 졸로투힌스키(Zolotukhinsky)와 같은 러시아식의 성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집을 가면 성이 바뀌는 러시아와 달리 카레이스키, 즉 한인 출신자들은 고유한 전통에 따라 자신의 성을 끝까지 고수했으며 그 덕분에 김, , 박과 같은 대표적인 한국 성은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빅토르 최의 집안 또한 뼈대 있는 씨 성을 잘 고수해왔던 것이다.

 

빅토르 최의 할아버지였던 최승준 옹은 전 북한 문부성 차관이자 카자흐스탄 이주동포 대표였던 고() 정상진 선생과도 막역한 관계였으며, 생전 촤승준 옹의 환갑잔치 때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기록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정상진 선생의 진술에 따르자면, 빅토르 최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양인이라 하기엔 큰 키를 가지고 있어 유별스레 눈에 띄었다고 한다. 또한 성격이 활달한 편이 아니라 혼자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한다.

미하일 바야르스키와 소비에트 최고의 음유시인 블라디미르 브이소츠키, 그리고 배우 브루스 리를 존경해왔던 빅토르 최는 그들로부터 많은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 하는데, 예술 학교를 다니던 17세부터 이미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친구들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바탕으로 아마추어 그룹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음악적 행로가 바로 전설적인 록그룹 <키노>의 전신이 된 것이다.

1980년대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록 그룹이었던 <키노>는 빅토르 최를 리더로 하여 유리 카스파랸과 이고리 찌호미로프, 게오르기 귀야노프에 의해 결성되었다. 서정적인 가사와 독특한 리듬으로 유명한 <키노>의 음악은 전통적인 록에서 찾기 힘든 다양한 색채의 리듬을 사용해왔으며 음울한 듯, 한 편의 시를 낭송하는 듯 호소력이 짙은 노래는 청자들의 가슴 깊숙이 강한 메시지를 남겼다.

 

어쩌면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우연적이고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타고난 재능은 우연에 의해 발휘될 계기를 가졌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밴드 <아쿠아리움>의 리더 보리스 그리벤시코프가 뜻밖의 기회에 그의 연주를 듣게 되었는데 이때 젊은 록커로부터 큰 감명을 받은 그가 음악적으로 빅토르 최를 후원하며 앨범 프로듀싱을 맡아 주었다.

그의 도움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 바로 첫 번째 정규 앨범 <45>(1982)이다. 당시에는 빅토르 최와 알렉세이 르이빈, 고작 이 두 명의 멤버가 전부였던 상황이라 앨범 제작이 어느 때보다 힘들었는데, 다행이도 첫 번째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키노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앨범에 실린 <알루미늄 오이>, <8학년 여학생>, <나의 친구들>, <엘렉트리치키> 등의 노래는 성공에 밑거름을 마련했으며 45분의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는 이 앨범은 소비에트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대중들의 삶을 담고 있어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가 활동하던 소비에트 시절에 록 음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과 서방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록이 간주되다 보니 정부적인 차원에서 제재와 단속이 심하였고 빅토르 최의 활동 또한 이런 이유로 많은 제한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활발히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룹은 정부의 허가를 받은 몇몇에 불과했으며 공연을 위한 무대조차 제공받지 못한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사랑을 보내온 수많은 팬들이 있었기에 그룹 <키노>는 급속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45> 앨범에 실린 곡들의 독창적인 리듬과 혁신적인 가사, 저항적인 음악은 빅토르 최의 음악세계를 표상했으며 거기에 매료된 청중들은 빅토르의 노래를 급속도로 확산시켜 나갔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해진 노선과 방향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소비에트 인들의 얘기가 고스란히 담긴 이 앨범에는 시사적인 문제와 이데올로기에 관한 가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 보니 <일렉트리치카>와 같은 노래는 끝내 금지곡으로 정해지고 말았다. 반대로 빅토르 최는 민중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더욱 주목받았으며 이후 이어진 반전가요와 반사회적 노래들로 정상의 길을 더욱 공고하게 닦아갔다.

이후 <46>(1983), <캄차트카의 관리>(1984), <이건 사랑이 아니야>(1985), <>(1986), <혈액형>(1988),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마지막 영웅>(1989), <검은 앨범>을 발매하며 <키노>는 소비에트 최고의 록그룹으로 수성을 지켜왔으며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여름이 끝나가네>와 같은 주옥같은 노래들은 자유를 갈망하던 젊은이들에게 위안이자 삶의 동력을 제공하였다. 록 음악의 정신을 저항이라 하였던가. 그런 면에서 빅토르 최의 음악은 저항의 대변자였다 하겠다.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만의 음색에는 무엇보다 진실성과 진정성이 담겨 있었고 실례로, 당대 최고 그룹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최가 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 지하실에서 보일러를 관리하며 살았다는 일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1987년에 이르러 <키노>는 음악생활의 절정에 접어든다. 당시 발매된 <혈액형>앨범은 키노

를 둘러싼 대중적인 현상까지 일어나게 할 정도였으며, 신경제 정책을 펼치고자 하였던 소비에트 후기의 정치인들도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비극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으니. 1990815일 소비에트의 공화국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로 향하던 중 투쿰스라는 지역 인근에서 버스와 충돌해 빅토르 최는 그만 요절하고 만다. 그의 죽음 또한 많은 의문을 남겼는데, 경찰의 진술에 따르자면 그의 차가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오던 트럭과 정면충돌했다 한다. 그럼에도 수많은 팬들은 사고의 배후에 당국과 비밀경찰의 개입이 있지 않았나하는 의혹을 수없이 가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다음 앨범 제작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데모 테이프를 온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는 점인데, 이때 찾아 낸 자료를 가지고 마지막 앨범인 <초르느이 앨범>, 즉 검은 앨범을 제작한 것이다. 가사 하나하나가 철학적 의미를 담은 마치 시와 같은 빅토르 최의 유고 앨범은 전설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실히 증명하듯 세월을 거슬러 아직도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여전히 변함없이 사그라질 줄 모르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도 모스크바의 중심에 자리한 아르바트 거리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벽이 마련되어있으며 페테르부르크의 묘소에는 해가 가도 변함없이 참배객들이 줄을 이어 일 년 내내 헌화하곤 한다. 그는 지금 페테르부르크의 보고슬로프스키 무덤에 안장되어있다.

 

 

빅토르라는 이름의 별, 빅토르 안

 

2014년은 그 시작부터 여느 해보다 남달랐다. 말의 해라 그런지 정초부터 힘찬 도약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으며 2월부터 시작된 동계 올림픽과 패럴림픽으로 세계는 축제의 분위기로 흥겨움이 가득했다. 특히 소치 올림픽은 최대 참가국과 최대 투자비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올림픽 기간 중 세계여론의 화제에 중심이었던 인물은 단연 빅토르 안(Viktor An)이었다. 세계 최초 동계 올림픽 6관왕, 쇼트트랙의 살아있는 전설, 굳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이 정도만 거론하면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알 것이다. 짐작컨대 안현수를 모르고 쇼트트랙을 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니 말이다.

안현수. 쇼트트랙의 거장.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 대한민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여 금메달 3, 동메달 1개를 획득,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국가 대표로 활동하며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를 5연속 제패한 진정한 쇼트트랙의 달인. 2003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쇼트트랙 남자 1500m30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였으며 급기야 금년 소치 올림픽을 통해 올림픽 사상 최초로 여섯 번의 우승을 차지한 유일무이한 인물.

대개의 사람들이 아이스링크의 슈퍼스타 안현수의 모습만을 상상하곤 하지만 필자는 스케이트 날을 벗은 인간적인 모습의 안현수를 찾아보기로 했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 2011년이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KBS의 이명우 피디와 함께 그를 방문한 필자는 천진한 소년 모습의 한 스케이트 선수와 만날 수 있었다. 다소 멋쩍은 듯 인사를 건넨 그는 자신의 방으로 우리를 초대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안현수 선수와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그는 재활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고 아직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을 때였다.

그의 방은 모스크바 근교의 노브고르스크의 선수촌 안에 있었다. 세간이라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만 갖추었을 뿐, 너무나도 소박했으며 어디에서도 스타로서의 화려한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낯설게 시작된 첫 만남이라 우리는 먼저 그의 성장 배경에 대해 물어보았고 그로부터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를 잠시 들을 수 있었다.

19851123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이유에서도 아닌 초등학교 특기활동을 통해 스케이트를 처음 접했다고 했다. 당시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특별활동 수업을 통해 스케이트를 타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때 친구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것이 너무나 즐거워 이후에도 종종 아이스링크를 개별적으로 찾았다 한다. 이렇게 여가를 활용해 그저 즐기던 일이 오늘날 세계적인 선수 안현수를 길러낸 촉매역할을 한 셈이다. 이후 명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명지 중학교를 거치며 안현수는 동계 체전에서 수많은 메달을 따며 빙상 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심지어 세게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모든 운동선수들이 그렇겠지만 최종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가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자신의 조국을 위해 메달을 따는 것일 것이다. 그가 가진 올림픽과의 인연도 남다를 바 없었으나 상대적으로 일찍 시작되었다. 채 스무 살도 되기 전인 2002년 동계 올림픽에서 신예로서 천 미터 결승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으며, 계주 종목에서는 다른 선수들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각종 세계 신기록을 비롯하여 난공불락의 쇼트트랙 황제로 한동안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길흉은 항상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였던가. 뜻하지 않은 불화와 부상은 그에게 크나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쇼트트랙 분야에 세계 정상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2008, 시즌 초반만 하여도 안현수는 빙상 월드컵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이어갔으며 더욱이 역대 최고 계약금과 함께 성남시청에 이미 입단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스케이트 선수로서 탄탄대로를 그려나가던 찰나, 훈련 도중 뜻하지 않은 부상이 찾아왔다. 어지간한 부상이 아닌 무릎 관절부위의 뼈가 두 동강 난, 그야 말로 선수로서의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크나큰 시련이 닥친 것이었다. 정상인이라면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큰 부상이었는데 이런 몸으로 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순간적인 스피드를 위해 다리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하는 스케이트 종목을 계속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와중에 벌어진 빙상연맹과의 불화도 또 하나의 시련으로 다가왔다. 부상 이후 몸을 추스르기도 바빴을 터에 갑작스레 바뀐 국가 대표 선발일정은 더욱 부담스럽게 다가왔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 방식마저 기존의 방식이 아닌 타임레이스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안현수를 견제하기 위해 일정과 방식을 바꾼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그 해 5월 군사훈련을 위해 입소가 계획되었던 터라 가을로 급작스레 바뀐 기간은 사실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것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결과에 상관없이 묵묵히 경기에 임했으며 아쉽게도 대표팀 선발에 탈락되는 비운을 경험하게 된다. 그해 말 급기야 소속팀이었던 성남시청마저 재정문제로 해체되어버리고 갈 곳을 잃은 안현수는 훈련에 집중하지 못한 채 이듬해에도 대표팀 선발에 탈락하고 만다. 이처럼 파벌 싸움 문제로 세간에 오랫동안 이슈를 받아온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후배들과 주변 인물들을 위해 말을 아꼈다. 누구 하나 피해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연신 강조하던 그는 지나간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흘려보내고 후배들이 더욱 나은 환경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오히려 염려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본인은 한국의 피를 타고 났음을 한시도 잊지 않기에 더욱 우리선수들의 앞길에 무궁함을 빌 뿐이라 전하였다.

 

이러던 찰나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가 찾아왔다. 지인의 권유 등 다른 나라에서 선수생활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미국과 다른 몇몇 나라가 당시에 물망에 섰지만 그는 과감히 러시아를 택했다. 그리고 안현수는 보기 좋게 일어섰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모든 힘을 다해 재활에 전력했다. 러시아 빙상연맹 측에서도 그런 그의 패기를 알았던지 정상적인 컨디션을 찾기 전까지는 어떠한 대회나 훈련도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는 배려를 해 주었다. 한참의 시간을 재활에 쏟은 결과 그의 몸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술 이후 약해진 근육은 다시 전성기 때의 몸을 찾아갔으며 실전에서의 감각을 쌓기 위해 그는 마인드 컨트롤을 해가며 예전의 기량을 되살려 나갔다. 드디어, 2012년 귀화 이후 안현수는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에서 계주 대표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2013년부터는 각종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성공적인 복귀를 예고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그는 황제의 귀환을 입증했으며 올림픽 6관왕이라는 초유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런 그가 러시아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평소 즐겨듣던 음악이기도 하였고 또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빅토르 최의 영향으로 본인도 이름을 빅토르 안으로 바꾸었다. 또 승리를 의미하는 빅토리(Victory)에서 유래한 빅토르라는 이름이 그에게는 너무나 걸맞았다. 올림픽 이후 러시아 언론에서는 빅토르 최의 노래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을 두고 <빅토르 라는 이름의 별>이라 바꾸어 부르며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급기야는 안현수를 칭송하는 <비짜, 전진!>(비짜-빅토르의 애칭)이라는 노래까지 나오기도 하였다. 현재 빅토르 안은 러시아의 영웅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체육인에게 주어지는 국가훈장을 수여하였으며 러시아 대표 팀의 기둥으로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 소치 올림픽 이후에도 꾸준한 성과를 보인 바, 그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황제의 재림을 이어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그의 사생활에 관해 궁금해 하고 있는 반면, 정작 지금의 안현수는 너무나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5월에 있을 벨로루시에서의 전지훈련을 제외하고서는 10월경이나 대회가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러시아 생활을 더 정리하고 개인 몸 관리에 충실히 하겠다는 것이 금년 계획이라 한다. 또한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은 아파트의 내장공사가 아직 조금 남아있어 가을까지 집을 마무리하는 것이 안현수 선수와 아내 우나리 씨의 올 최대 계획이라 한다.

한때 대한민국의 스포츠 인으로서 올림픽에서 한 회에 가장 많은 메달을 딴 선수로 기록되었으나 이제 빅토르 안, 안현수는 세계인으로서 쇼트트랙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었다. 과거 그가 한국인이었다, 지금은 이방인이다 하는 문제는 이제 잠시 접어두고 한 사람의 선수로서 러시아의 전설을 넘어 세계무대에서 변함없이 더욱 값진 선수생활을 보낼 수 있길 넌지시 기대해 본다.

두 명의 빅토르, 그들의 전설은 계속되리니!

 

출처: 우먼 라이프 2014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