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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러시아 지역소개 및 생활 정보

겨울 밖의 이색 러시아

겨울 밖의 이색 러시아

러시아 남부 도시, 크라스노다르

   

우리의 상상 속에 혹은 기억 속에 러시아란 어떤 나라로 각인되고 있을까? 둥근 테두리의 검은 색 모피 모자를 쓰고 뻣뻣하고도 짙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두터운 가죽장화를 신고 발을 구르며 민속춤을 추는 곳? 또는 혹독하리만치 추운 날씨로 양 볼이 빨갛게 상기된 여인들이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채 전통에 따라 빵과 소금을 들고 거리로 나와 손님을 맞이하는 곳? 그것도 아니라면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설원 속에 엄숙하고도 차분한 새벽의 정적을 뚫고 맑은 연기를 뿜으며 곧장이라도 의사 지바고의 유리아틴으로 향할 듯 기적을 울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활기찬 전경?

그렇다. 어느 하나 틀림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이 눈꽃 가득한 겨울 러시아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다. 그럼에도 설국 러시아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들이 전부는 아니니. 독자들은 한번이라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푸른 파도에 비키니를 입고 이국적인 야자수 아래 물놀이를 즐기는 러시아 여인들을. 한겨울임에도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수 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카프카스 산맥의 준봉들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스키와 빙벽 클라이밍을 즐기는 산사나이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 속의 러시아는 눈과 보드카, 그리고 긴 모피코트에 장화를 신은 이들이겠건만 이에 반할세라 남국의 정취를 가득 품은 러시아의 한 켠도 있으니. 그 가운데 러시아 남부지역을 대표하는 쿠반 지역의 수도, 크라스노다르(Krasnodar)를 독자들께 소개할까 한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선물, 크라스노다르

넓은 동쪽의 태평양을 품고 있는 러시아라 하지만 정작 그곳 사람들이 바다를 접하기란 비교적 용이하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소유한 탓에 추코트카(Chukotka),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와 같은 극동지구를 제외한 시베리아 내륙에 사는 이들 중에는 생애 단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한 이들도 있으며, 심지어 한번 바다를 보러가기 위해서는 기차로 수일을 달리던지 비행기로 몇 시간씩 날아가야 하는 곳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남쪽 끝에 자리한 에메랄드빛의 흑해는 진정 보석과도 같다. 일 년 내내 따뜻한 해풍이 크고 작은 도시를 감싸며 태양을 가득 머금은 온기로 잎사귀 넓은 열대과수를 살찌우는 땅. 그러기에 어느 지역보다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여유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들. 이처럼 러시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색적인 풍광을 펼쳐 보이는 곳이 바로 쿠반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곡창지대로 유명한 쿠반 지역은 수도인 크라스노다르를 중심으로 러시아 남방의 문화와 예술을 키워나갔다. 1793년 예카테리나 여제로부터 도시 승격을 받은 크라스노다르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화가 된 1920년까지 장장 127년간 예카테리노다르라 불렸다. 러시아어로 다르가 선물을 의미하듯, 그들에게 있어 도시 승격은 예카테리나 여제가 안겨 준 커다란 선물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제의 이름을 따 최초의 도시 명을 예카테리노다르라 만든 것이다.

대륙으로 향한 드넓은 곡창지대와 남쪽으로의 카프카스 산맥, 그리고 동쪽 150킬로미터에 위치한 흑해와 아조프해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크라스노다르 지역의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실제로, 문명의 흔적은 이미 6세기 전부터 이곳을 지나갔으니, 고대 스키타이인과 메오트인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그리스와 카프카스, 터키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의 경제 교역지로서 크라스노다르는 일찍부터 큰 역할을 하였다. 크라스노다르를 거쳐 흐르는 쿠반 강 오른 편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대 문명은 기원전 3-4세기에 이르러 마을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으며, 지류인 카라순 강에서는 농경문화가 정착되어 유목민과는 대별되는 삶이 영위되었다.

20세기 초반에 들어, 혁명군과 반혁명군으로 나뉜 내전 기간 중 이곳은 황실 군대인 백군의 주요 전략지로 역할을 하였으며, 1961년에는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던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크라스노다르에는 러시아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를 보이고 있으나, 토착민인 아드게이인을 비롯하여 타타르인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그리스, 독일, 그리고 우리의 고려인 등등 많은 이민족도 함께 터전을 영위하고 있다.

 

 

나보코프에서 푸쉬킨까지 - 러시아 문학 지상주의

도시 중심을 관통하는 크라스나야 거리를 거닐어 본다. 휴일이 아님에도 한적함은 왠지 모를 전원의 향취와 제법 어울리게 느껴지며, 잘 정돈된 가로수 길에서는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흘러나올 법 하다. 현대식 담장 너머 소비에트 식의 목조 가옥들이 드문드문 보임에도 이곳 거리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신기한 것은 소치 올림픽을 앞두고 크라스노다르는 분명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터인데 어디 한곳에서도 시끄러운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75만에 달하는 인구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차분하기 그지없는 쿠반의 수도 크라스노다르는 그럼에도 역시나 문화의 중심지임을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동상이 세워진 도심 공원에서는 지긋한 연세의 할머니들이 정겹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한 사람 인상 찡그리는 일 없이 휴일의 망중한을 즐기듯 거리 곳곳 미소가 가득하다. 길 건너 한 쪽 편에는 볼쇼이 극단의 유명 음악감독이 건너 와 부흥시켰다는 발레극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구 백 만도 채 되지 않는 도시에서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발레와 클래식 음악 콘서트가 정기적인 레퍼토리를 가지고 공연된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수도 모스크바에서나 제대로 된 연극 공연을 관람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했던 방문객들은 크라스노다르 드라마 극장의 <바냐 외삼촌>을 본 후 그 뛰어난 연기력과 진지함에 경외심을 표하기까지 한다.

불과 10여 분 정도 거닐었을까. 크라스나야 거리의 다른 한 편에 어딘가 낯설지 않은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알렉산드르 푸쉬킨, 바로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인의 전신상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지라 이 곳 크라스노다르와는 남과 북으로 갈리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지역민들의 뜨거운 열정이 도심 한 복판에 다른 누구도 아닌 푸쉬킨을 세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천카페마저 이곳에서는 문학을 담고 있다. <롤리타>(Lolita)라는 소설로 현대 세계 문학에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며 러시아 문학의 명성을 드높인 망명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 Nabokov)의 이름 을 딴 카페가 보란 듯 거리 한 모퉁이에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페 내부에는 벽장 가득 책이 꽂혀 있었으며 차를 마시는 이들의 담소 또한 지극히 문학적인 그것이었다.

시내 건물의 벽은 어떠한가. 피카소를 방불케 한 모자이크 형식의 예술품이 서점 옆 건물의 한쪽 벽면 전체를 덮고 있었으니, 가히 어느 국가의 지방 소도시라 생각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크라스노다르에는 다양한 예술 문화로 가득 차 있었다. 벌써 수십 년 째 이 벽을 지켜오며 보수하고 있다는 문화부 직원의 말에 고유와 전통으로 대변되는 옛터를 점점 잃어가는 우리네 도심풍광이 떠올라 아쉬움과 씁쓸함이 교차하였다. 최근 들어 보존에 힘쓰고 있는 문학가의 생가와 옛 시장터, 민속마을들이 더더욱 많은 관심 속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기를 잠깐이나마 빌어본다.

 

 

쿠반 코사크의 영혼이 깃들다

일찍이 러시아 남부를 풍요롭게 했던 쿠반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크라스노다르 지역은 천해의 자연이 선물한 약속의 땅이었다. 러시아 전역에 생산되는 쌀의 70퍼센트가 이곳에서 생산되며, 따뜻한 대지의 기운으로 갖가지 과일과 해바라기, 사탕무 등 먹거리가 일 년 사시사철 가득하다. 풍부한 일조량 탓에 러시아 최고의 와인 또한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하는데,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와인에 견주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고 하니 땅의 비옥함과 기후의 온화함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여기에 더해 현대에 와서는 농업뿐만 아니라 자원개발에도 두각을 나타내 러시아 내 석유, 가스 주요 생산지역 가운데 한 곳으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크라스노다르의 정유공장을 거쳐 많은 자원들이 유럽으로 수출되거나 러시아 국내로 유입된다고 한다.

이처럼 돈 강 유역에서 카프카스 산맥까지 이어지는 크라스노다르 평원은 수분을 머금은 흑해의 훈풍으로 더욱 비옥해졌으며, 그 규모에 비해 한적함을 띄지만 곳곳이 풍성한 천연 경관으로 가득 차 있다 보니 어느 곳에 눈을 둘지 모를 터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로움은 적들에게도 눈독 들이고픈 보물창고였으니. 중세시대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던 이민족들은 잠간의 쉼도 없이 침략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크라스노다르는 자연스레 러시아 남부 국경지역의 요새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곳을 지킬 강력한 군대가 필요 했다. 러시아에서 용맹하기로 단연 으뜸인 코사크 군대가 이곳을 지키게 된 데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도시 명칭을 부여한 여왕의 자존심을 위해, 그들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코사크 기병대는 쿠반 강의 드넓은 평야와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들을 오르내리며 침략군을 물리쳤다. 이처럼 수많은 코사크 병사들의 피와 애국심으로 다져진 땅이기에 오늘날까지 코사크의 기념행사는 이어지고 있으며 그들이 지켜낸 쿠반 땅에 대한 충성심은 전 러시아에 걸쳐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박물관을 방문해 보았다. 2층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단연 예카테리나 여왕이 도시 명칭을 부여한 기록이 담긴 친서였다. 수많은 전쟁 중에 아직도 원본이 남아있음은 코사크 부대가 크고 작은 전투 속에 친서를 생명같이 지켜온 덕이라 한다. 여왕의 친서를 끼고 좌우측 모두 코사크 군대의 깃발과 각종 의복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만큼 이 지역에서 코사크 군대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에 놓인 탓인지 제정 러시아 당시의 일반 가옥 구조는 우리네 그것과 너무나 유사했다. 가령,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시골 가옥은 마치 조선시대 초가집을 옮겨놓은 듯하였다. 짚을 엮은 지붕에는 집지킴이 구렁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올 듯 했으며, 마당 우측에 자리한 우물은 어디선가 아낙네가 급하게 뛰어와 밥 지을 물을 금방이라도 길어올릴 기세였다. 뜰 안 나무 아래 놓인 탁자는 또 어떠한가. 먹음직스레 잘라놓은 수박은 누군가 한 입 베어 먹다 잠시 자리를 비운 듯 나무 식탁의 한 가운데 덩그러이 놓여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쿠반 코사크의 전통적인 삶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졌다니 어디에나 사람 사는 모습은 그다지 다름이 없는 듯하다.

지난 수 세기 간 스스로의 터전을 지키며 살아온 코사크인들. 그들의 끊임없는 애국과 충절, 그리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문화를 지키고자했던 뜨거운 열정에 따뜻한 감동을 안고 크라스노다르를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