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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세상의 아침>- 러시아 광역 전철

촬영 기간: 2009년 10월 중순
방영 일시: 2009년 11월 중순
촬영 지원: 한러문화 연구원
관련자료: 월간<우먼 라이프>

 

도심 속 지하공원 - 모스크바 매트로(Metro)


글․박정곤


일 년의 절반가량이 얼음과 눈으로 덮여있다 할 정도로 기나긴 겨울을 자랑하는 동토의 러시아. 11월의 모스크바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도 이미 그 모습을 감추었으며, 나뭇잎을 떨어뜨린 자작나무 숲도 이제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려는 듯 동장군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다. 이처럼 영하를 넘나드는 추위로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지만, 그럼에도 유독 산책을 즐기는 러시아 사람들은 옷깃에 스며드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한권의 책을 들고 벤치에 앉아 독서를 즐기곤 한다.

서리 낀 가로수를 따라 더러는 아이들과, 더러는 개를 끌고 거니는 산책자들의 표정 속에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지는데,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네의 가을 정경과는 사뭇 달라 다소 낯설게까지 느껴지곤 한다. 특히, 우리의 가을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유독 남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땅 밑을 쉼 없이 누비는 '지하철 속 풍경'이라 하겠다.

모스크바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붉은색으로 쓰인 커다란 'M'자를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로 매트로(metro), 즉 지하철을 의미하는 약호이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세계의 여느 대도시와 다름없이 도시인들이 가장 즐겨 이용하는 이동수단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진 광경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얼핏 떠올려 보았을 때, 지하철역은 전동차가 토해내는 시끄러운 굉음과 붐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리라 생각하겠지만,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선남선녀가 만남을 약속하고 차를 나누는 모습도 종종 목격된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환승 통로에 서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바이올린을 켜는 악사들, 또 멋지게 춤 솜씨를 뽐내는 젊은이들도 곳곳에 즐비해 있다. 과연 이곳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살며시 들여다보자. 


전쟁과 평화, 그리고 공존의 장 - 매트로(metro)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심철도는 주요한 이동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서울과 대구, 부산과 같은 대도시에서 지하철은 혼잡한 피크 타임(peak time)을 탈출할 수 있는 해방구와 같은 수단으로 쓰이는데, 이는 이곳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광역철도의 개념과 맞물려 도심 철도의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 러시아의 지하철은 우리에게 새로운 개념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모두 12개 노선으로 구성 돼 있다. 모스크바 지하철공사가 단독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곳의 연간 승객 수는 24억 7500만 명. 하루 이용객만 9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모스크바 시민들의 "발"로서 기능하고 있다. 또한 12개 노선의 총연장노선은 293킬로미터에 달하며, 무려 176개의 역이 각각의 노선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모스크바 지하철 공사는 시내를 두르고 있는 순환 노선인 ‘칼초’(кольцо)노선 외곽에 두 번째 순환노선을 건설할 계획이다. 또한 오는 2015년까지 40킬로미터에 달하는 모스크바 외곽을 잇는 광역 연결 노선을 완공할 계획이라 한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단순히 이동수단으로서의 효용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하철 역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그 깊이이다. 표정이 없어 다소 딱딱해 보이는 매표소직원으로부터 표를 구입한 후 에스컬레이터에 첫발을 올리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아래로 뻗어 있는 깊이에 아찔하기까지 하다. 내려가는 동안 에스컬레이터 사이에 세워진 광고판을 보거나 가로등의 수를 세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이처럼 지하로 깊게 들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부터 출발하였다 한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을 거치면서 소비에트 사회는 도시방호라는 목적으로 지하철을 보다 깊게 건설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땅속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전시가 되면 지하철은 지하 대피소 혹은 응급 진료소로 활용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기에 소비에트 특유의 엄격함이 공존하기도 한다. 어느 역을 가던 터널 입구에는 커다란 전광판과도 같이 전자시계가 설치되어 있다. 이는 차량의 이동시간을 재기 위한 용도인데, 한참을 기다려야 다음 열차가 오는 우리의 지하철과는 달리 최단 1분30초에서 최장 2분 30초를 넘지 않는 간격으로 거의 정확히 운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해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안성맞춤이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맛볼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겠다. 

아울러, 냉전의 이면에는 ‘평화’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역사의 내부 장식들이 그러하다. 모스크바 지하철 노선은 가히 소비에트 건축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도시 중심을 도는 순환 노선을 따라 즐비해 있는 대부분의 역에는 화려한 예술장식들이 가득하다. 더욱 정확히 말해 각각의 역이 하나의 예술품이라 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다. 실례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로 다다를 수 있는 키예프 역은 플랫폼 양측 벽면에 소비에트를 상징하는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벨로루시로 뻗어나가는 벨로루스카야 역은 수많은 천장화와 벽화, 부조들로 구소련 장식 예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화려한 내부 장식에 취해 아름다움에만 치우쳤다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모스크바 지하철에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플랫폼마다 안전 요원이 상주하고 있으며, 에스컬레이터 양끝에도 간이통제소가 배치되어 있다. 경찰 병력 또한 상당수가 배치되어 있어 혹 축구경기가 있기라도 한 날이면 수십 명의 무장경찰들이 무리를 지어 순찰하며 안전에 만전을 기울인다.

물론, 한국과 달리 경찰 병력이 무장을 하고 있어 다소 긴장감을 유발할 수도 있으나, 그들의 총구 너머로 잔잔히 울리는 노(老)악사의 아코디언 선율은 향긋한 커피 향을 연신 떠오르게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예 바이올린과 첼로, 콘트라베이스까지 동원하여 미니 오케스트라를 꾸민 이들도 이곳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주 활동공간이 지하철이다 보니 멀리서 그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연주하는 이들에게 있어 지하철은 마치 출퇴근 장소와도 같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렇듯 편리성에 더해진 예술성과 안전성은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타인과 더불어 살아감을 가르쳐주는 ‘공존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유럽 최고 깊이의 지하 산책로

개개 역사(驛舍)마다 개성이 넘치다 보니 모스크바에서는 어느 한 역을 찍어 뛰어나다 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실제로 방문객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특히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은 콤소몰스카야 역이다. 이곳은 높은 천창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찾아오는 이들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콤소몰스카야 역은 1935년 5월에 개통되었는데 이는 1934년 10월에 건설된 모스크바 최초의 지하철역인 '소콜리키' 역으로부터 연장되어 나온 것이다. 런던과 유럽의 지하철에 비해 비교적 늦게 건설되기는 하였으나, 이곳은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3개의 역인 레닌그라드스키 역, 야로슬라프스키 역, 카잔스키 역이 모여 있는 콤소몰스카야 광장에 위치하고 있어 이용객의 수만큼은 최고라 할 수 있다. 현재 자리하고 있는 역사(驛舍)는 1952년에 재건축된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장미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닥은 화강암 재질로 장식되어 있어 콤소몰스카야 역에서는 색조의 대비가 더욱 선명히 느껴진다. 특히 외부 골조만 건축가가 시공하고 내부 장식은 예술가 E.란세레가 직접 도맡아 벽면 곳곳에 장식과 모자이크, 벽화를 새겨 넣었다. 그러기에 콤소몰스카야 역은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지하철 역사로 자리매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방문객의 눈을 끄는 곳이 있다면, 시설의 독특함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곳들도 있다. 그 가운데 파르크 파베디(‘전승기념 공원’이라는 의미) 역은 엄청난 깊이로 이용객들에게 색다른 묘미를 느끼게 만든다.

비교적 최근인 2003년 5월에 완공된 파르크 파베디 역은 M.부브노프와 V.니콜라예브나가 설계하였다. 이 역은 들어서는 순간 승객들로부터 미로에 빠진 듯한 느낌을 심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플랫폼까지 닿는데 걸리는 시간만 3분이 넘기 때문이다. 길이로 보았을 때 이곳은 유럽에서 최장인 무려 126미터에 달하며 에스컬레이터 계단은 총 740개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걸어 올라가더라도 쉬지 않고 단번에 오른다면 다리가 아플 정도이다. 이런 특성 탓에 어떤 승객들은 에스컬레이터 처음부터 책을 펴서 읽으며 유유히 내려가기도 한다.

지하 플랫폼에 도착하면 우리를 반기는 것은 커다란 벽화. 청춘 남녀는 이곳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 앞 벤치에 앉아 데이트를 즐기곤 한다. 특히 저학년 아동들은 근처에 위치한 전승기념 박물관에 가기 전에 반드시 이곳에 들러 지도교사의 인솔에 따라 벽화를 감상하기도 혹은 그 앞에 헌화를 하기도 한다. 여기에 양측으로 오가는 철도 차량의 외벽은 갖가지 그림들로 도배되어 있어 실로 바라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도색된 철도 차량이 들어서는 순간 시민들은 마치 문화 공간 속에 빠져드는 듯하며, 내부 또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 느낌은 마치 우아한 갤러리에 방문함과 같다. 평균 시속 60킬로미터의 속도감 느껴지는 갤러리에서 시민들은 우아하게 그림을 감상하며 목적지까지 제시간에 다다를 수 있어, 바쁜 일상 속에 두 가지 기쁨을 지하철 내부에서 만끽할 수 있는 셈이다. 이처럼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단지 이동수단만이 아니라 하루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거리에서의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하나의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문화와 예술, 효용가치의 조화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모스크바 지하철을 따라 긴 탐험을 하다 보니 정작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하철역이 너무 땅속 깊이 있어 불편한 점은 없는가라고 불쑥 던진 질문에 모스크바 시민들은 한결같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화려한 장식의 건물내부가 마치 전시장을 느끼게 한다며 자국의 지하철을 한껏 뽐내던 어느 모스크바 시민은 이곳을 주로 만남의 장소로 이용한다고 하였다. 더욱이 부러웠던 것은 모스크바 시민들뿐만 아니라, 간간이 오가는 외국인관광객들마저 수려한 건축양식에 매료되어 연신 감탄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지하철도 ‘빠른 이동수단으로서의 기능’이라는 고정관념을 좀 더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문득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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